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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소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유고 시집 "충분하다" 고양이를 사랑한 시인

by 다독다감 2021. 8. 7.

비스와바 쉼보르카의 유고 시집 <충분하다>(2016)는 시인의 마지막 두 권의 시집 <여기>(2009)와 <충분하다>(2012)의 수록작 전부를 최성은 선생이 번역해 묶은 것이다. 

쉼보르스카는 86세 고령에 자신의 열두 번째 시집 <여기>를 출간하고 나서 향후에 집필하게 될 새로운 시들은 동료 시인이었던 리샤르트 크리니츠키가 편집주간으로 있는 출판사 "a5"에서 출간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시집 제목으로는 "충분하다"를 생각해두었다는 말에 크리니츠키는 그저 농담으로만 들었다.

 

그러나 시인에게 시집 <충분하다>를 끝마칠 시간을 허락되지 않았고 운명은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리샤르트 크리니츠키는 쉼보르스카가 직접 타이핑한 원고를 본문에 싣고 시인이 남긴, 거의 완성단계인 육필 원고는 사진과 함께 부록에 실어 유고 시집 <충분하다>를 출간했다.

 

비스와 쉼보르스카 유고 시집 표지

폴란드 언론들은 <충분하다>의 서평을 게재하면서 유고시집이 아닌 신간 시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평생을 시와 함께 살아온 쉼보르스카가 이제 정말 마지막 시집을 내고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폴란드인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렸다.

누구에게나 언제가는(80쪽~ 81쪽)

가까운 이가 죽음을 맞이하는 건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일어나는 일,
존재할 것이냐 사라질 것이냐,
그 가운데 후자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했을 뿐.

단지 우리 스스로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할 뿐이다.
그것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라는 걸.
과정의 일부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이란 걸.

조만간 누구에게나 닥치게 될 낮이나 저녁.
밤 또는 새벽의 일과라는 걸.

색인의 명부와도 같이.
경전의 조항과도 같이.
달력에서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고른
수많은 날짜 중 하나와도 같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자연의 음양.
되는대로 움직이는 자연의 불길함과 신성함.
자연의 살아 있는 증거이자 전능함.

 

<충분하다>에 실린 "누구에게나 언제가는" 시의 일부이다. 인간은 필멸자이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다가와 있기도 하고 멀리 있기도 하다. 어디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시는 죽음을 예감한 시인이 사후의 독자들에게 남기는 위로의 아포리즘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시인은 미완성의 육필 원고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시인의 자연스러운 마음이 느껴진다.

미완성 육필 원고 부분(147쪽)

어쨌든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
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

 

나는 세상을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누곤 한다. 어느 날 한 문인이 쉼보르스카에게 '만약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사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쉼보르스카는 크리니츠키 부부의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대답했다.

 

크리니츠 부부는 고양이 여러 마리를 키우는 고양이 애호가였다. 고양이에 대한 쉼보르스카의 애정은 너무나 각별한 것이어서 "신이 만든 가장 성공적인 피조물은 바로 고양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충분하다'는 시인 자신에게, 애독자들에게 꼭 건네고 싶었던 마지막 말이다.

쉼보르스카는 어린 시절 영화 관람과 그림 그리기, 노랫말 쓰기가 취미였다. 열네 살 때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다 읽었다. 젊은 시절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의 사상에 심취했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새무얼 핍스와 조너선 스위프트,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셜록 홈스 시리즈의 애독자였고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의 열열한 팬이기도 했다.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와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들을 좋아했고 렘브란트나 베르메르의 회화를 사랑했다. 시인의 미적 취향과 예술적 기호는 그녀의 시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쉼보르스카의 시에는 다양한 회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화가가 응축한 시간의 단면들을 쉼보르스카는 영속성에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한 순간으로 생명을 부여했다. 시 "베르메르"를 보라. 순간의 예술인 그림과 시간의 예술인 문학이 얼마나 황홀하게 접목하고 있는가를.

베르메르(61쪽)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세심하게 화폭에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쉼보르스카는 자신이 상상하는 독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내가 생각하는 내 책의 독자는 남자건 여자건 간에 아무튼 인생에서 크게 성공한 상류층의 모습은 아니에요. 수영장과 분수대, 온갖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호화로운 저택에 앉아 내 시집을 읽는 독자의 모습은 왠지 상상이 가질 않아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거든요."

 

"반면에 내 머리 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독자의 이미지는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갔지만, 일단 지갑에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다시금 확인해봐야 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에요. 돈이 많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망설이지만, 그래도 꼭 읽고 싶어 끝내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내가 상상하는 내 책의 독자들입니다."

 

쉼보르스카의 육필원고

<충분하다>를 읽으면 옮긴이 최성은 선생의 말처럼 "너무 애쓰지 마요, 너무 서두르지 마요. 이미 당신은 충분합니다."라고 토닥이는 쉼보르스카의 위로가 느껴진다.

 

부록으로 실린 쉼보르스카의 시만큼이나 정갈한 필체의 육필원고는 애독자들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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