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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거나 말거나,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서평집

by 다독다감 2021. 7. 9.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은 서평을 어떻게 쓸까? <읽거나 말거나>(2018)는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30여 년에 걸쳐 남긴 서평을 모은 책이다. 블로그에 서평도 올리고 있으므로 <읽거나 말거나>는 당연히 읽어 보야할 필독도서다.

 

폴란드의 중서부의 작은 말을 쿠르티크에서 태어난 이 여류 시인은 여덟 살 때인 1931년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로 이사하여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으며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은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 2012년 영면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1967년 6월 문예주간지 <문학생활>에 발표한 서평을 시작으로  2002년 6월까지 30여 년 동안 총 562편의 서평을 남겼다. 그중 12년 동안은 두 편의 서평을 격주로 게재했다. 

 

국내에 번역된 <읽거나 말거나>는 137편의 서평이 엄선되어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책이나 모차르트나 슈베르트, 히치콕, 채플린, 니체, 릴케와 같은 예술가들의 회고록이나 평전에 대한 서평을 우선순위에 올렸다고 역자후기에서 최성은은 밝혔다.

 

최성은이 번역한 읽거나 말거나

<읽거나 말거나>의 원서 제목은 <비필독 도서>이다. 필독도서는 들어봤어도 비 필독도서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당시 <문학생활>에는 권위 있는 문학 작품들을 소개하는 '필독도서'라는 칼럼이 연재되고 있었는데, 쉼보르스카의 비필독도서 칼럼은 그와 대구를 이루는 대중적이고 다양한 장르의 도서들을 소개하는 칼럼이었다. 비필독도서라는 이름은 쉼보르스카의 취향을 잘 반영하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를 좋아한다. 그녀가 '시단의 모차르트'라고 불려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간명한 언어가 좋았고 섬세하고 풍부한 상징과 메타포가 좋았기 때문에 그녀를 좋아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읽거나 말거나>를 읽으면서 내가 왜 그녀를 좋아하는지 점점 명확해졌다. 이외의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녀만의 취향이 서평에는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를 넘어 인간 쉼보르스카를 좋아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쉼보르스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은둔의 시인이었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언론에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삶의 태도가 더할 수 없이 좋았다. 스크린에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내미는 유명인사나 학자, 예술가들은 이미 본업을 내팽개친 사이비 교주나 다를 바 없다.

 

얼굴이 드러나는 데 대한 근원적인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던 시인이 좋았다. 익명의 존재로 남을 수 있었다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아마도 그렇게 살았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사는 곳이나 성별, 나이 등 신상 모두를 블로그에 익명에 붙이는 연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인의 <읽거나 말거나>는 세상에 드문 서평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서평은 볼 수 없다. 국내 작품에 대한 평론이나 서평, 추천사를 읽어보면 용비어천가 일색이라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말들이 다 진실했다면 우리나라에도 벌써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수십 명은 나왔어야 했다.

 

그들만의 리그는 그렇다고 쳐도 그들과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개인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에도 뭐든 추켜세우기에 바쁜 글들이 대개 넘쳐난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이다. 

 

그러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달랐다. 이 엄청난 독서광은 장르불문, 별의별 책을 다 읽었다. 그녀가 읽은 <포옹 소백과>(캐슬린 키팅, 1995)에 대한 서평, '인류를 위한 포옹'(338-340)을 보자. 아마도 포옹을 하면 행복해지니 일상에서 열심히 포옹을 하자고 주장하는 책이었던 모양이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쓴 내용을 - 만약 사람들이 지금보다 자주 서로를 안아준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진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인 듯하다... 뭐 맞는 방법일 수도 있다. 안 될 것도 없겠지...

내가 신경이 쓰이는 건,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포옹을 강화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이다. 그 어떤 동작도 너무 자주 반복하다 보면, 결국엔 평범해지고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건 뻔한 이치다.

 

이어서 쉼보르스카는 포옹이 이타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친환경적인 정서를 갖게 되고 식욕을 억제하여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을 주고 근육도 탄탄해지고 노화 방지에도 효과적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기분은 좋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의 품속에 서로를 가두어야 되만 되는 상황에 몰아넣자는 저자의 주장에 대경실색한다.

 

그러면서 이 책의 저자가 대서양 너머 아주 먼 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한다고 덧붙이다. 이 얼마나 시인다운 불편함의 표시인가.

 

또 <카사노바>(헤르만 케스텐 지음, 1975)에 대한 서평은 이렇게 남겼다. 회고록에서 카사노바는 종종 허풍을 늘어놓는다고. 카사노바를 거절할 수 있는 여인은 거의 없었지만 모든 여성들이 카사노가 자신을 차 버리는 걸 너무도 쉽게 허용했다는 데 쉼보르스카는 의구심을 느낀다.

 

그렇다면 카사노바에게는 여인들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올해 '세계 여성의 해'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자 한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이 얼마나 비판적인 책 읽기인가.

 

시인은 온갖 동식물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개가 아플 때>(패터 타이히만 지음)에 대한 서평에서는 쉼보르스카의 여린 감수성이 잘 드러난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낑낑대며 꼬리 치던 그 녀석이 갑자기 떠올라 애를 먹었다.

그들은 평생 동안 우리를 이해하고, 우리가 강요하는 기준에 맞추고,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자신들과 관련된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노력과 끝없는 긴장이 요구된다.

매번 우리가 집을 나서면, 마치 우리가 어딘가로 영원히 떠나기라도 하는 듯 절망에 빠져 눈물을 흘린다. 매번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면,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우리가 무사히 귀가한 듯 쇼크를 동반한 기쁨에 젖는다.... 우리도 그들처럼 당해 바야 그 절절한 아픔을 위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읽거나 말거나>에는 영화인들과 예술가와 관련한 책 서평이 많다. 시인 쉼보르스카는 어쩌면 채플린이 남보다 더 행복한 기질을 타고난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찰리 채플린이 쓴 <자서전>(1967)을 읽었다.

 

채플린에게 세상은 좀 더 단순한 것이 아니었을까. 채플린에게 좋은 영화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추측을 한다. 채플린은 독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외적인 부분들에 주목하도록 끊임없이 유도한다며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첨언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관객들을 울고 웃기는 그의 오래된 영화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위안을 삼는다. 

 

이 서평집에서 가장 공감 가는 글은 <담배는 숭고하다>(리처드 클라인 지음)에 대한 서평인 '이 기회에 한마디'이다. 세상에는 온갖 책들이 다 있나 보다. 해비 스모커로서 백 퍼센트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나는 이 책의 제목과 몇 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 부연설명에 그만 낚이고 말았다."라는 말로 서평을 시작한다.

 

이내 저자의 논평 자체가 상당히 따분하고 지나치게 심리분석적인데, 과연 이 책의 어디에 베스트셀러로서의 저력이 깃들어있다는 건지 의심스럽다고 팩폭을 한다. 그리고는 흡연자라는 아주 개인적인 고백과 사적인 부탁 두 가지를 비흡연자들에게 은근히 한다. 

 

비스와바 쉼브로스카(1923-2012)

쉼보르스카는 건강에도 나쁜 담배를 나이 들어서도 끊지 못하는 자신에게 속상해한다(나 역시 그렇다.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며 그 누구에게도 흡연을 권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래도 부탁은 해야 되겠다는 투로 말한다.

1. 비흡연자 여러분! 제발 습관성 니코틴 중독을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중독과 동일선상에 놓지는 말아주세요. 지금껏 니코틴 중독 때문에 인도로 차를 돌진시킨 운전자가 있다든지, 집에서 아내와 아이를 정기적으로 학대하는 남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잖아요.

2. 모임에 골칫덩어리 흡연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부디 대단한 일로 취급하지 말아 주시고, 저녁 내내 그와 담배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는 건 지양해 주세요. 흡연이 그가 가진 가장 주요한 특성은 아니잖아요.(요약 발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이 주장은 비흡연자 여러분께서 꼭 새겨들어 주셨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그리고 수학적으로 머리가 영 둔하다고 고백하며 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아미르 학젤, 1988)에 대한 서평은 반가웠다. 이 책을 읽고 수학자를 꿈꾸게 된 어린 친구들을 드물게 봤었다. 

 

페르마의 정리는 1637년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가 책의 여백에 남긴 추측이다. "나는 이것을 경이로운 방법으로 증명하였으나, 책의 여백이 충분하지 않아 옮기지는 않는다."라는 말과 함께.

 

그 이후로 358년 동안 갖은 노력에도 증명되지 못했던 이 추측은 수많은 천재 수학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천재 수학자 가우스만이 2주 만에 포기를 선언하며 빨리 고생길을 면했다.(이런 걸 보면 포기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다. 포기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1995년, 영국의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가 358년 동안의 수학자들의 힘들고 고된 여정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는 엔드루 와일스가 8년 동안의 고군분투가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을 읽은 대 시인은 감상평을 소박하게 마무리했다. 

독자 여러분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유하면서 나는 한 가지만 당부하고 싶다. 수세기에 걸친 이 고된 등반이 대체 무슨 의미냐고 묻지는 마시라. 수학자와 등반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니까.

 

이 위대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동양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한자>(미예치 스와프 예지 퀸스틀러, 1970)에 대한 서평에서 "한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라고 썼다. 이 서평에서는 시인의 예민한 젠더 감수성이 느껴진다.

한자에는 여성에 대한 적대감이 반영되어 있다. '싸움'을 뜻하는 한자에는 두 명의 여자가, '배반'이라는 단어에는 무려 세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아내는 여자에다 빗자루를 결합시켰고 애인은 여자에다 피리를 결합시켰다. 이상향이라는 의미의 한자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빗자루에 피리를 결합시켜놓은 형태가 아닐까 싶다.(요약 발췌)

 

그런데, <삼국지>에 대한 서평은 나를 웃음 짓게 했다. 러시아 소설들, 특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었을 때 그 무지막지한 등장인물들과 긴 이름들에 질린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쉼보르스카 역시 <삼국지>를 읽으면서 그랬던 모양이다.

 

삼국지 주인공들의 이름이 때로는 이렇게 표기했다가 때로는 저렇게 표기하는 데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것. 그러므로 이 소설을 제대로 완독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푸념한 시인은 번역본의 경우 주요 인물들의 경우 이름의 표기는 반드시 하나로 통일한 필요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또 인명 색인도 책 말미에 붙이는 등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확신컨대 이 책을 끝까지 꼼꼼하게 읽을 사람은 편집자들밖에 없을 듯하다고 제언한다. 1만 부나 되는 초판을 찍어놓고, 고작 서너 명은 너무 한 것 아니냐고.

 

만약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를 만날 영광이 있었다면 삼국지를 제대로 독파하는 법을 재미있게 말씀드렸을 텐데 이미 고인이 되셨으니 슬플 따름이다.

 

쉼보르스카의 시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여러 서평 속에서 싯구의 화석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예컨대, <찰스 디킨스>의 서평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인류를 사랑할 뿐 아니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작가... 바로 디킨스다."

 

이 구절은 훗날 "선택의 가능성"이라는 시 속에서 진화된 언어로 탄생된다. 이러한 시적인 발견은 <읽거나 말거나>를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도스도엡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류를 사랑하는 나 자신보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열녀 중의 열녀 춘향 이갸기>(한국어판에서 할리나 오가렉 최 옮김, 1970)에 대한 서평은 춘향전에 대한 그 어떤 서평보다도 서정적이다. 한 편의 시 같다. 머나먼 이국, 폴란드에서 까마득한 춘향의 옛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읽었던 위대한 시인이 있었다니 경이롭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마지막 시집 <검은 노래>에 대한 서평

 

검은 노래,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생애와 시 세계

마음이 아플 때 시는 아주 작은 위안이 됩니다. 투명한 물망울 같은 영혼과 시간을 돌로 쌓아가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힘겨운 자아를 보듬어 줍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세계가 제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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