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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소설

검은 노래,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생애와 시 세계

by 다독다감 2021. 6. 15.

마음이 아플 때 시는 아주 작은 위안이 됩니다. 투명한 물망울 같은 영혼과 시간을 돌로 쌓아가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힘겨운 자아를 보듬어 줍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세계가 제게는 그러합니다.

 

비스와바 쉼브로스카(1923-2012)의 시집 <검은 노래>는 시인의 사후에 발굴된 미공개 초기작들과 그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이 수록된 마지막 시선집입니다.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폴란드가 낳은 여류 시인입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던 이 위대한 시인은 생전 시집 열두 권만 남겼습니다.

 

쉼보르스카 시 세계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 그녀의 시 세계는 명징한 시어로 빚어낸 맑은 물방울들이 천진한 이슬로 빛납니다. 전쟁의 참혹함은 쉼보르스카의 시어를 더욱 간절함으로 조탁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 거주하던 유대인 약 3백만 명을 학살했고 전쟁으로 폴란드는 약 6백만 명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유슈비츠 이후에는 아무도 시를 쓸 수 없다는, '비누 거품 같은 말'조차 내뱉을 수 없는 참혹한 현실 속에도 시인은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시를 기다린 건 아니다; 내가 온 건/ 찾아내고, 낚아채고, 움켜쥐기 위해서다./ 살기 위해서다"(시. 위령의 날, 41쪽)

 

전쟁은 시인의 몸을 관통하며 인간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천 명에다 한 명이 더 죽어도, 여전히 천 명이라고, 그 한 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말하는 세상에서 개인의 미시 서사에 시인은 몸과 마음으로 집중합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검은 노래

남겨진 자의 슬픔과 회한을 절제된 시어로 참아냈던 시인은 시인의 꿈을 향해 조용히 다가오는 그를 위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슬픔에도 바쳐야 할 시가 있다면 바로 이 시, '풍경과의 이별'일 것입니다.

 

연인 코르넬 필립포비츠에게 바치는 헌시이기도 했던 이 시는 쉼브르스카에게 '그'가 세상의 풍경이었고 모든 것이었다는 고백과 다름없습니다.

풍경과의 이별

나는 너보다 더 오래 살았다.
이렇게 멀리서 네 생각에 잠길 만큼
딱 그만큼만 더.

 

풍경과의 이별은 시집 <끝과 시작>(339-340쪽)에 실린 시입니다. 시집 <검은 노래>에는 저 위대한 시의 단초를 만나볼 수 있는 초기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돌아온 회한

죄와 벌에 대한 아무런 예감 없이
먼지보다 하찮은 순간들로 
나는 너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날 용서치 말기를)
마치 꿈속의 그 아이처럼. 벌레처럼

 

옮긴이 최성은의 말처럼 쉼보르스카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검은 노래>의 수록작을 읽으며 이처럼 후기작과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시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진짜 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시를 읽을 수 없다고 말했던 노 시인. 아래에 소개하는 "두 번은 없다"는 저의 가슴을 울리는 명시 중의 명시입니다.

 

두 번은 없다 Nic dwa razy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은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게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옮긴이 후기에서 최성은은 쉼보르스카의 초기작들이 시집으로 출간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시인이 출판을 철회했다는 설과 사회주의 정권의 검열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고 소개합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생애

쉼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도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외부 강연이나 언론 노출을 자제한 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글쓰기에 전념한 시인이었습니다.

 

쉼보르스카는 1951년 마침내 시인의 걸을 걷기로 비로소 결심하고 문예지 <크라쿠프 메아리>와의 인터뷰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시를 썼고, 시를 쓰고 있다. 나는 시를 쓸 것이다."

 

은거하며 다작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새기며 자아를 성찰하는 작가들이 저는 좋습니다. "너무 애쓰지 마요. 너무 서두르지 마요. 이미 당신은 충분합니다."라고 토닥였던 쉼보르스카 할머니가 그리워지는 푸른 밤입니다.

 

우리 고전 <춘향전>을 읽고 춘향이를 걱정하는 서평까지 남겼던 쉼브르스카 할머니이기에 그의 시어가 더 애달픕니다. 쉼보르스카는 아담 브워데크와 1948년에 결혼했으나 1954년에 이혼하고 친구로 지냈습니다. 

 

1972년 쉼보르스카는 열 살 연상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코르넬 필립포비츠와 각별한 사이가 되어 애인이자 친구이자 비평가로서 그가 사망하는 1990년까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2012년 2월 1일 쉽보르스카가 영면한 후, 그해 4월 유고 시집 <충분하다>가 출간되었고, 2014년 초기작을 모은 <검은 노래>가 출간되었습니다.

 

비누 거품 같은 말이라도 장난으로나마 건넬 수 있는 자아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슬픔과 회한이 유령처럼 배회하는 일상에서 먼지보다 하찮은 순간들로 '나는 너보다' 더 오래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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