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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과 공감

첫사랑을 못 잊는 이유가 자이가르닉 효과는 아니다

by 다독다감 2021. 6. 1.

첫사랑의 색감과 온도는, 사람들마다 천양지차, 각양각색 다르지만 대개는 동화속 한 장면처럼 풋풋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추억하는 것 같습니다.

 

혼자 몰래 한 짝사랑이든 부모님의 반대나 이런저런 이유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든 상관없이요.

 

첫사랑을 못 잊는 이유

어쨌든, 사람들은 첫사랑을 오래도록 '아름다운' 기억으로 '추억'합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죽음의 마지막 순간, 생의 마지막 힘을 짜내 한 숨을 토해내는 그 힘든 순간에도 첫사랑의 풋풋한 감성을 회상하며 죽어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뭐, 거의 사기성에 가까운 풍문 같아요.

 

삶의 마지막 숨을 들이시는 사람에게 "야, 니 지금 첫사랑 생각하고 있는 기가?, 갸가 떠오르는 기가?" 이렇게 물을 사람도 없거니와 설령 묻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삶의 마지막 숨을 내쉬며 그 시답잖은 질문에 성실하게 답할 기운이 남아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거든요.

 

첫사랑과 자이가르닉 효과 

아무튼, 심리학에서는 첫사랑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를, 꿈에도 못 잊어하는 이유를 우리 뇌가 마치지 못한 일은 마음속에서 쉽게 지우지 못한다는 자이가르닉 효과에 빗대 설명합니다. 

 

러시아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은 어느 날 식당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밀려드는 주문을 웨이트가  헷갈리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걸 보고 너무 신기해서 계산 후에 당신이 방금 옆 테이블에 갖다 준 메뉴가 뭐냐고 물었어요.

 

"모르는데요. 근데 서빙이 끝난 메뉴를 제가 왜 기억하고 있어야 되남유?"

 

네, 맞아요.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시험을 쳤는데 시험을 치고 난 후에도 그 내용을 속속들이 기억하는 놈이 바보겠지요? 우리 뇌는 완결된 일은 일단 깨끗이 지우버리고 나머지 자원을 미완성된 일에 집중한다는 게 자이가르닉 효과예요.

 

픽사베이에서 첫사랑으로 검색하면 첫 번째로 띄워주는 이미지입니다.

블루마 자이가르닉은 웨이트가 메뉴를 기억하는 방식에 자극받아 연구를 계속했고 마침내 사람들은 완결된 사건은 기억에서 재빠르게 지워버린다는 걸 발견했고, 이름하여 자이가르닉 효과라 불리게 됐어요.

 

그래서 첫사랑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가 완결되지 않는 사건,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자이가르닉 효과 때문이라는 설명들을 여러 곳에서 그럴 듯하게 하고 있습니다.

 

최신 효과 편향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심리학에서 말하는 또다른 이론, 최신 효과 편향(recency effect bias)을 떠올려보면 자이가르닉 효과를 첫사랑에 적용하는 건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최신 효과 편향이란 인간의 뇌는 무조건 과거에 일어난 일보다 최근에 일어난 일에 가중치를 두어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걸 말합니다. 구태의연한 사건들은 무시해야 진화론적으로 생존에 유리하니까요.

 

만약 최근에 비행기 사고가 있었다거나, 열차 사고가 발생했다면 우리의 뇌는 그 사건을 극대화시켜 (사건의 발생 확률은 깡그리 무시하고) 비행기나 열차가 우리의 생존을 크게 위협하는 교통수단으로 인지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첫사랑은 과거에 일어난 일인데도 불구하고 최근에 일어난 연애 경험보다, 단지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래된 연애 경험을 더 감미롭게 우리 뇌가 기억하고 있다는 자이가르닉 효과라는 설명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론 같아요.  

 

그리고 첫사랑뿐만이 아니라 그 뒤로 이어지는 무수한 연애도 결코 완성되거나 해결된 적이 없긴 건 마찬가지이니까요. 첫사랑에게만 유독 그런 지위를 부여하는 건 합리적은 추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므두셀라 증후군

첫사랑의 못 잊음은 자이가르닉 효과보다 굳이 심리학 이론을 끌어들인다면 므두셀라 증후군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므두셀라 증후군은 예일대학교 출신의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아이바흐와 리사 리비가 발견한 편향으로 한마디로 '왕년에 좋았던 옛날' 편향을 말합니다. 아마도 옛날 어른들한테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버릇이"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므두셀라 증후군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에녹의 아들이자 노아의 할아버지인 창 던지는 자인 '므두셀라'에서 따온 편향입니다. 장수의 상징, 므두셀라는 구약, 신약 통틀어 가장 가장 오래 산 인물입니다. 므두셀라는 노아의 방주가 일어나던 해까지 살았는데 그 때 나이, 969세!

 

우리의 뇌는 과거를 기억할 때 나쁜 기억은 되도록이면 소거하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쪽으로 작동한다는 게 므두셀라 증후군의 요지입니다. 어린 시절일수록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 위주로 기억이 왜곡되어 있다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사랑도 오래되었기에 첫사랑과 싸운 기억은 모두 소거되고 좋은 기억으로만 우리 뇌는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므두셀라 증후군 또한 첫사랑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므두셀라 증후군이 과거 기억에 대한 보편적인 현상이라면 다른 연애경험에도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니까요.

 

첫사랑이 떠오르는 순간

그러니, 첫사랑이 그렇게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데는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비밀은 첫사랑을 떠올리고 추억하는 '그 순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대개 어떨 때 첫사랑을 생각하시나요? 첫사랑이 생각나는 그 순간을 떠올려 보시면 첫사랑의 그 달콤한 비밀을 어느 정도는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인생에서 눈부신 시절을 회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라떼는 말이야~, 왕년에 내가 말이야~, 하는 순간은 화려했던 과거지사를 소환하는 순간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꿈을 먹고 살아갑니다. 꿈이 사라지는 순간은 삶의 희망을 놓아버리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회고하는 순간은, 존재론적으로 가장 슬픈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지금'이 마땅찮고 불만족스러우니 자신이 잘 나갔다고 생각하는 그 '과거'를 소환할 수밖에 없습니다.

 

풋풋한 만큼 순수했고, 열정적으로 사랑했다고 믿고 싶은 인생의 그 순간을 소환하지 않고는 지금의 불만족, 불운을 극복할 길이 없다고나 할까요?

 

구체적으로는 파트너와 불화하거나 삶이 무기력해지고 우울한 일상이 지속될 때, 아마도 첫사랑이 떠오르는 순간이 아닌가 합니다.

즉, 현재의 파트너가 불만족스럽기도 하고 지금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라는 한탄의 순간,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이미지가 첫사랑입니다. 흔히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 너머에서 가끔 첫사랑의 얼굴이 보이는 까닭입니다.

 

더욱이 첫사랑은 '잘 될 수도 있었던' 선택을 영원히 미루어놓은 상태이니 짠한 연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흘러간 세월은 언제나 늘 아름답고 추억 속의 첫사랑은 동화처럼 신비한 모습입니다.

 

첫사랑이 떠오를 때는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나, 설령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살고 있다고 해도 나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 과거의 자신도 부정되고 마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되니까요.

 

그러니, 첫사랑이 떠올 때는 조용히 자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조용히 자기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는 능력이 필수입니다. 이것이 나이 먹은 자의 지혜의 아닐까 합니다.

 

첫사랑과 영원을 약속하였더라도 현실 속에서 같이 오래 살아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첫사랑과 살아본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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