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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소설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의 생애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by 다독다감 2021. 6. 18.

해마다 오늘이 되면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생각합니다. 

 

시집 따위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두메산골 초등학교였는데, 그해 전학 온 열두 살 짝꿍이 시집 <님의 침묵>을 보여주며 함초롬한 눈망울로 "너 만해 한용운 아니?"라고 물었을 때부터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시작되었습니다.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이 발표한 '님은 침묵'은 한국일보가 1999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시문학 사상 가장 넓고 높으며 깊은 인간성을 표현한 절실한 시로 21세기에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작품, 첫 번째로 꼽혔습니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은 저에게 '불가능성'만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릴 적 서당에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던 한용운이 철학과 문학을 스스로 공부하고 동인 활동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문인이 되어서만은 아닙니다.

 

독립운동에 앞장 서기도 한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한 거의 모든 문인들이 변절하고 말았지만 만해 한용운은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은커녕 아예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던 불굴의 저항정신 때문만은 아닙니다.

 

풍찬노숙을 하며 독서로 불교와 동서양의 철학을 깨치고 어용화의 길을 걷던 조선불교의 개혁과 의병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는 단호한 결의를 덧붙여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암흑했던 한국문학의 맹아기였던 일제강점기, 사상과 실천이 일치하는 민족시인으로서 시집 <님의 침묵> 외에도 수필  "고학생", "최후의 5분간" 등과 "흑풍", "박명"과 같은 장편소설을 남긴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문인이어서도 아닙니다.

 

만해 한용운의 불가능함을 설명할 수 있는, 우리 문학사에서 시대를 더해갈수록 빛나는 별과도 같은 시, 님의 침묵 원문을 아주 천천히 타이핑해봅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불굴의 저항정신으로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오직 독립투사로서 생을 살았던 한 투박한 사나이가 이렇게 감미로운 님의 침묵을 썼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시입니다.

 

님의 침묵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회환에 젖은 아녀자의 슬픈 눈물이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운명을 감싸고 도는 시입니다.

 

평론가들은 님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님은 깨달음의 존재인 부처다, 님은 조국이다, 님은 사랑하는 연인이다 등등 해설이 분분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님은 깨달음의 존재도, 조국도, 연인도 될 수 없습니다. 만해가 불교개혁 운동을 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고, 대처승으로서 사랑도 하였지만 '님의 침묵'에서 그가 말한 님은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한용운에게 님이란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스스로 사랑을 깨칠 것을 종용하는 존재였습니다. 그 존재는 또 만해로 하여금 슬픔의 힘을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게 만듭니다.

 

한용운에게 님이란 그런 상징이었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불가능성은 예컨대 또 이런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또 다른 위대한 시, '알 수 없어요'를 음미해 보겠습니다.  

알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엊그제 올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여성적인 시어로 가득 찬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성 시인이 쓴 시로는 믿긴 힘든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도 풍찬노숙을 하던 독립투사가 말입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 수직의 파문, 검은 구름,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알 수 없는 향기, 연꽃 같은 발꿈치, 아, 도저히 불가능한 시어들을 이 감미로운 리듬에 실어내는 이 시인을 저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만해 한용운이 노래하는 님은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로서든, 불교에 천착한 승려로서든, 예술을 하는 시인으로서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상징으로서의 님이었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생애 

법명인 만해로 더 많이 불리는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천(당시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인근에서는 어린 나이에 한학을 배운 한용운의 집을 '신동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열네 살에 성혼한 한용운은 동학란과 갑오경장을 겪으며 부모 형제를 모두 잃고 열여덟 살 나던 해에 가출하여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불목하니가 되어 선수행에 정진했습니다.

 

그러나 타는 목마름으로 오세암을 떠나 만주와 시베리아를 정처없이 배회하는 세월을 보냅니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 다시 설악산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불문에 듭니다. 백담사에서 독학으로 불경을 우리글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고 <조선불교 유신론>도 발표합니다.

 

1910년에는 만주에서 의병학교를 세우고 <불교대전>을 발간하고 전국 사찰을 돌며 강의와 담론을 주도하던 한용운은 불교 잡지 <유심>을 창간하고 청년불교 운동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1919년, 독립선언서에 공약 3장을 덧붙인 만해 한용운은 체포되어 옥중에서 명문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합니다. 3년 옥고를 치른 그는 출옥 후 빼어난 연설가로서 활동을 이어가며 드디어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합니다.

 

1927년에는 좌우파가 합작한 '신간회' 발족에 앞정서 참여하고 1930년에는 비밀결사단체인 '만당'을 조직하고 친일파로 전락한 권상로에게 인수한 <불교>을 발간하는 일에도 전념했습니다.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 운동에 바친 이 위대한 투사, 만해 한용운은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던 생애와 영원히 이별하였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열두살 짝꿍이 건넨 시집 <님의 침묵>은 인생에서 받은 첫 선물이었습니다. 두메산골에서 코흘리개 골목대장을 일삼던 나에게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아, 이런 세계가 있었다니!

 

어린시절 함께 암송하던 시집은 잦은 이사통에 온데간데 없이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누구랑 짝꿍하고 싶니라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섬섬옥수로 "쟤요"라던, 지나치게 영민하고 날카로웠던 그 어린 영혼도 오래전 제 곁을 떠났습니다.

 

그날처럼 여름 바람이 세차게 대지를 휩쓸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푸른 여명을 몰아치며 소쩍새 구슬피 울어대는 새벽입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뜻밖의 이별에 놀란 가슴은 유월 이날이 되면 새로운 슬픔에 터지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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