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었지만 이야기의 힘이 아직도 빛나는 한국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해준 감독이 연출하고 두 정씨, 정재영과 정려원이 주연으로 출연한 <김씨 표류기>(개봉: 2009. 5. 14)입니다.
<김씨 표류기>는 개봉 당시에는 70만 관객에 그쳤지만 개봉 이후 오히려 호평이 이어지고 해외에서도 웰메이드 한국 영화로 알려진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넷플릭스에서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원제는 'CastawayOn The Moon'입니다. 원제에서 보듯 <김씨 표류기>는 톰 행크스가 주연으로 출연한 <캐스트 어웨이>(2000)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표류를 소재로 했지만 두 영화는 결이 조금 다른 영화입니다. <캐스트 어웨이>가 무인도의 탈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영화는 무인도에 갇힐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씨 표류기 줄거리
이 영화에는 두 김씨가 나옵니다. 남자 김씨(정재영 분)는 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여자 친구에게 차인 상태에서 2억 원이 넘는 빚까지 지자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으로 뛰어듭니다. 하지만 매몰찬 한강의 물결은 김씨를 받아 주지 않고 무인도 '밤섬'으로 뱉어내 버립니다.
밤섬에 표류하게 된 김씨는 그래도 살아 보려고 김씨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는 휴대폰으로 구조를 요청하고 여객선이 지나갈 때마다 발버둥 쳐 보지만 모두 무의로 돌아가고 맙니다. 좌절한 김씨는 넥타이로 다시 한번 자살을 시도하지만 어이 없게도 배탈이 나고 맙니다. 죽는 것초자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김씨는 또 다시 절망에 빠집니다.
그리고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생존을 길을 걸어야 하는 남자 김씨의 밤섬에서의 고군 분투기를 이어갑니다. 인간은 진화의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김씨는 샐비어 꽃잎과 버섯을 따먹고 섬가에 떠내려온 페트병으로 샌들을 만들고 카페라테 뚜껑으로 멋진 선글라스 끼고 오래배로는 주택을 마련하는데 성공합니다. 남자 김씨는 이제 작살로 물고기도 한 방에 잡을 수 있는 어엿한 수렵 채집인이 됩니다.
이런 남자 김씨는 멀리서 망원경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번째 김씨, 여자 김씨(정려원 분)입니다. 여자 김씨(정려원)는 흔히 말하는 히끼꼬모리입니다. 그녀는 얼굴의 흉터로 학창 시절에는 집단 괴롭힘을 당했고 지금은 대인기피증 환자가 되어 함께 사는 부모조차 대면하기를 꺼리며 방에만 틀어밖혀 사는 극단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 김씨는 방에 틀어밖혀 밤을 지새우며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하고 달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텅 비어버린 거리의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바로 민방위 훈련 날의 거리 풍경이지요. 여자 김씨가 민방위 훈련 날의 거리 풍경을 이리저리 찍고 있는데, 우연히 밤섬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 남자 김씨가 앵글 속에 잡힙니다.
한편, 김씨의 눈에 버려진 짜파게티의 봉지가 들어옵니다. 그 봉지에는 면은 온데 간데 없고 스프만 달랑 들어 있었습니다. 김씨는 짜파게티 봉지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짜장면을 딱 한 번만이라도 먹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그의 온 몸을 점령합니다.
김씨에게 짜장면은 삶에의 강한 욕망의 상징으로 작동합니다. 김씨에게는 욕망이 없으면 삶 또한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김씨는 인류의 진화사를 연상케 하는 추론을 시작합니다. 새는 식물을 먹는다. 새똥에는 식물의 씨앗이 들어 있을 것이다. 씨앗이 싹을 튀우면 옥수수가 자라게 될 것이고, 옥수수를 갈아서 가루를 만들고 물에 개어서 반죽을 하면 면이 될 것이고, 그것으로 짜장면을 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김씨는 무작정 여기저기서 새똥을 긁어모아 땅에 심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몇몇은 드디어 싹을 띄워 옥수수가 자라고 콩이 자라고 오이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수렵 채집인 김씨가 농경인 김씨로 진화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짜장면을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남자 김씨는 짜장면을 먹다 감격의 눈물을 터뜨립니다. 눈물을 흘리는 남자 김씨를 망원경으로 보고 있던 여자 김씨는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이는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걸어왔는지 아는 자들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었고 미소였습니다.
두 김씨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교감하고 있었고, 마침내 그 성취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된 것입니다. 자세한 과정은 영화에서 코믹하면서도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으므로 꼭 직접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두 김씨의 감격은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전이되어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이 <김씨 표류기>의 킹받는 장면으로 꼽았습니다.
김씨 표류기 결말(스포일러)
그러나 남자 김씨가 밤섬에서 이룬 성취는 지속될 수 없는 모래성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순간 쏟아진 폭우로 그가 이룬 삶의 터전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는 환경정화를 나온 해병대원들에게 밤섬에서 다시 끌려 나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빈 손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 남자 김씨는 다시 절망감에 빠져 63빌딩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릅니다. 밤섬에서 끌려 나온 남자 김씨를 만나기 위해 여자 김씨는 처음으로 세상과 용감하게 대면하기로 결심합니다. 대낮에 세상을 뛰쳐 나온 여자 김씨가 남자 김씨가 탄 버스를 따라잡기 위해 뛰어가지만 놓치고 맘니다.
남자 김씨를 놓친 여자 김씨가 서럽게 우는 순간,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고 버스가 도롯가에 정차합니다. 다시 희망의 순간입니다.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딱 한 번 대면하게 된 두 사람. 엔딩 크레딧은 두 김씨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라는 걸 암시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김씨 표류기 해석
이 영화에서 두 김씨의 공통점은 현실과 동떨어진 고립된 세계에 갇혀 산다는 것입니다. 두 김씨가 어쩔 수 없이 ‘밤섬’과 ‘방’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초한 듯이 보이지만, 영화는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십분 공감하게 만들며 이야기를 이끌고 갑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어떤 이유에서 건 두 김씨처럼 자신이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단절감과 함께 현실도피를 꿈꾸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남자 김씨가 밤섬에서 구축한 세계는 현대인들의 마음 한 구석에서 자라고 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유토피아가 그렇듯이 밤섬의 유토피아도 한 순간의 태풍으로 날아가 버리고 남자 김씨는 밤섬에서 구조가 아닌 추방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남자 김씨는 모래성 같긴 했지만, 밤섬에서의 성취기억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소소한 성취의 기억이 인생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자 김씨 또한 오랫동안 남자 김씨를 지켜본 기억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두 김씨는 차가운 세상의 맨땅에서도 그 기억을 갖고서 서로에게 용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김씨 표류기>의 희망입니다. 서울을 가로지는 한강에서 한 남자가 표류하고 있을 때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여자 김씨에게도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김씨는 영화가 끝날 때쯤 딱 한 번 만나지만 그 만남은 세상의 그 어떤 만남 못지않게 공명을 울립니다. 표류하는 현대인들에게 치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영화로 기억에 남습니다. 세상은 어째든 살아가야 하고, 또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배우 정재영에게 기대는 바가 참으로 컸습니다. 밤섬에서의 지루하고 단조로운 1인 생존기를 정재영은 오롯이 혼자서 대사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끌어갔습니다. “진화는 어쩌면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극중 대사처럼 배운 정재영은 이 영화에서 또 한 단계 진화한 메소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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