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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과 공감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정육의 동양 미술 에세이집

by 다독다감 2021. 5. 23.

"사람은 비록 색깔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그때 이 책이 따뜻한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다."

 

동양 미술사학을 전공한 조정육이 자신의 동양미술 에세이집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아트북스, 2003)의 여는 글에서 한 말입니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그림들을 소개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따분한 미술사적인 책은 아닙니다. 글쓴이 조정육의 내밀한 체험과 그림을 연결시킨 담담한 에세이입니다.

 

조정육은 그림을 이야기하되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체험으로써 말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미술을 잘 몰라도 재미있게 잘 읽힙니다.

 

이 책의 처음 몇 장을 읽었을 때 수다에 재미있어 하며 페이지를 넘기기에 바빴습니다. 마흔을 갓 넘긴 여성의 그림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가족사와 가정사를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에 여과없이 풀어놓고 있습니다. 책장 넘기는 손이 점점 잦아들며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옵니다. 

 

저자 조정육은 민화 "모란도"를 보며 언제나 꽃을 좋아했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월야산수도"를 보며 일찍 생을 마감한 작은 오빠를 떠올립니다.

 

김명국의 "설경도"를 보면 서로를 위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떠올라 가슴이 아련해진다고 합니다.

 

팔팔조도가 그려진 책표지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그림 한 점, 가슴에 묻어둔 그림 한 점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책표지로 삼은 그림은 팔대산인의 '팔팔조도'라는 그림입니다.

 

그림 속 새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외발로 서 있는, 한 쪽 눈이 없는 비정상적인 이 새는 팔대산인의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그림을 볼 때마다 꼭 나의 자화상을 보는 듯해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합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마치 조선시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나는 마치 내가 조희룡의 그림 <매화서옥>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환각을 맛보았다.

 

매화를 무척 사랑하여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매화백영루'라는 편액을 달고 침실에는 매화 병풍을 둘렀으며 매화차를 마셨다는 조희룡. 그것도 모자라 매화 벼루에 매화 먹을 갈아 매화 시를 썼다고 한다."(133쪽)

 

<그림이 내게 말을 걸왔다>를 읽고 있는 나는 저자가 책을 읽고 있는 뜨그뜨근한 방바닥에 동석하여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면서 외부와 단절된 채 오롯이 그림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는 편안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거의 마지막 꼭지들을 읽어가고 있을 때 그만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말았습니다. 다 읽고 나니 한 편의 소설을 읽었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문장은 잔잔하게 좋았고 구성도 빼어났습니다. 저자가 체득한 그림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 놀라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림은, 예술은 그런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김홍도의 "씨름도"에서는 오로지 엿을 팔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흥분과 탄식의 도가니에 마음을 담그지 못하고 고독하게 등을 돌리고 있는 엿장수의 슬픈 존재감도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고전은 무엇보다 읽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히는 맛이 일품입니다.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읽고 나니 그림의 세계 또한 그렇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림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좋은 그림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저자 조정육의 그림 이야기를 통해 자신만의 그림 이야기도 생겨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일상이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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