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관통하는 덧없는 사랑에 대한 헌정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원작 영화
유한자인 인간은 젊었을 때는 철학에 심취하게 되고 늙어서는 철학을 멀리하게 된다. 그런데,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나이 들어서도 비애를 느끼게 되는 몇 안 되는 소설 중의 하나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도 그렇다. 삶은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단 한 번뿐이다. 작가는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는 독일 속담을 인용하며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생의 마지막 날, 마지막 날 숨을 힘들게 내쉬게 될 때, 내 삶에 대하여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눈을 감을까라는 두려움 같은 것.
그러한 생각이 엄습할 때, 영화 프라하의 봄은 위안이 된다. 이 영화에서 두 쌍의 남여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해 극명한 대조를 각기 이룬다. 필립 카우프먼 특유의 탐미주의가 흐르는 영화는 단조롭기 그지없다. 인생의 한 단면이니 어쩔 수 없다.
프라하의 봄이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른바 '체코 사태'로 불리는 소련군의 군사개입으로 민주자유화 운동을 주도했던 50여만 명의 당원이 제명 또는 숙청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9년 유신체제 붕괴와 5.18 민주화운동이 신군부에 의해 좌절될 때까지를 체코의 프라하의 봄에 빗대어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다. 두 운동 모두 아주 잠깐의 봄으로 끝났다. 마치 우리들 인생처럼.
영화 정보
원제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 번역해야 정확하지 않았을까.
개봉 1989.07.08
장르 로맨스/멜로/드라마/미국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러닝타임 171분
감독 및 배우
감독 필립 카우프먼
주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 줄리엣 비노쉬, 레나 올린, 데릭 드 링, 스텔란 스카스가드
영화 OST
야나체크 피아노곡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 On the overgrown path> 중, 날아가버린 잎새, 프리덱의 마돈나, 밤 인사, 올빼미는 날아가지 않았어, 현악 4중주 제1번 크로이처 소나타, 제2번 비밀편지.
프라하의 봄 줄거리
1968년 체코의 수도 프라하. 이혼남 토마시(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는 유능한 외과의사이다. 의사로서 유능함만큼이나 여자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능수능란하다.
수술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그가 여자에게 옷을 벗어라고 말하면 여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옷을 남김없이 완전하게 벗으니까 말이다. (참고로 프라하의 봄은 수위가 꽤 높은 데도 모자이크 처리되지 않고 서비스 되는 영화 중의 하나다)
그러나 토마시는 여자와 가벼운 관계를 가질 뿐, 함께 자는 법은 없다. 토마시에게 여자는 그가 말한 대한 '에로틱한 우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는 이 여자에서 저 여자에게로 옮겨 다닐 뿐이다.
세상에는 그런 토마시를 아주 잘, 깊게 이해하는 여자도 있다. 바로 화가 사비나(레나 올린 분)이다.
그녀에게 조국 체코나 이념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사비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여자와 가벼운 관계를 가지는 토마시가 좋을 뿐이다.
어느 날, 토마시는 온천 마을에 수술을 하러 출장을 간다. 수술을 마친 토마시는 호텔 스파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테레사(줄리엣 비노쉬 분)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인다.
테레사가 일하는 호텔 식당까지 은밀히 따라간 토마시는 우연인척 가장을 하고 책을 읽으며 코냑을 주문한다. 테레사는 모든 것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여자다.
6호실에 묵고 있던 토마시가 술 값을 숙박비와 함께 계산하겠다고 하자, 당신은 6호실에 묵고 있고, 난 6시에 퇴근한다며 의미를 부여한다. 저런!
테레사는 이후 토마시와의 모든 만남에 대해 그런 식으로 의미 부여를 하며 그들의 관계가 필연임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킨다. 그녀가 늘 책을 읽던 벤치에 앉아 있던 토마시를 보고서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테레사는 항상 책을 들고 다닌다. 책을 숭배하는 여자다. 토마시와 만난 첫날, 그녀가 들고 간 책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후에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한 토마시와 테레사는 그 강아지를 '카레린'이라고 불렀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그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테레사는 용감하게도 홀로 짐을 꾸려 프라하에 있는 토마시를 찾아온다. 그리고 둘은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 테레사가 순정파였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결혼을 거부해 왔던 토마시도 '강물에 떠내려온 아기' 같은 테레사에게 연민을 느끼며 결혼을 하게 된다.
토마시는 그러나, 결혼을 했다고 해서 한 여자에게 정착할 수 있는 운명은 아니었다. 사랑은 사랑이고, 섹스는 섹스 일뿐, 테니스를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그가 말했지만, 테레사는 그런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거리에는 프라하의 봄을 끝장 낼 소련의 탱크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테레사는 프라하를 떠나면 토마시의 방탕도 끝날 것이라 기대하며, 또 소련의 압제를 벗어날 겸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한다.
하지만 토마시의 바람기는 제네바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제네바에서 토마시와 관계를 이어가던 사비나에게도 남자가 생긴다. 심지어 그 남자, 삶에 진지했던 교수 프란츠는 아내와 이혼을 하고 사비나 앞에 나타나 연정을 불태우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사비나 또한 정착할 수 있는 류의 여자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계속되는 토마시의 애정행각에 절망하던 테레사는 홀로 프라하로 다시 돌아온다. 테레사가 떠나고 난 후, 자신의 인생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무게감을 비로소 느낀 토마시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찾아 프라하로 돌아온다.
프라하에서 토마시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의사직 박탈. 그가 오이디푸스 신화에 빗대 공산당의 눈알을 뽑아야 한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글을 취소하겠다는 진술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대가였다. 공산당의 회유에도 토마시는 양심을 버릴 수는 없었기에 유리창을 닦는 노동자로 살아간다.
프라하의 봄 결말(스포)
사상의 자유 앞에 양심을 지켜냈던 토마시였지만 그가 유리창을 닦고 있을 때, 집 안에서 그를 유혹하던 여자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절규하던 테레사는 그의 방식을 이해하기 위하여 술집에서를 그녀를 도와주던 엔지니어를 찾아가 관계를 가지고 만다.
압제와 방탕을 벗어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테레사와 토마시는 시골 농장으로 삶을 의탁한다. 농장에서 한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둘은 어느 날 농장 사람들과 함께 4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여인숙으로 파티를 하러 간다.
흥겹게 술 마시고 춤을 추고 돌아오던 길, 토마시와 테레사는 빗길에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고 말했던 토마시의 말처럼 그의 인생은 한 번뿐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인생은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지워지고 사라져간다.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인 인생을 누구나 살다 간다. 예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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