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소설만 읽고 있습니다. 자아가 저 깊은 바닥을 기어가는 시기에는 픽션이 작은 도피처가 됩니다. 오늘은 베키 앨버탤리의 첫 소설 <첫사랑은 블루>(2017)를 읽었습니다.
<첫사랑은 블루>는 열여섯 살 소년 사이먼의 첫사랑 이야기를 그린 성장소설입니다. 전형적인 미국 하이틴 로맨틱 소설풍으로 우울증에는 오히려 이런 과장된 설정과 문체가 약이 되기도 합니다.
사이먼은 흔히 말하는 게이입니다. 사이먼이 이메일을 통해 알게 된 블루와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과 커밍아웃을 고민하는 감정이 풋풋하게 다가오는 소설입니다.
작가 베키 앨버탤리
<첫사랑은 블루>는 베키 앨버탤리가 임상 심리학자로 일하면서 워싱턴에서 LGTB 청소년들의 심리 상담을 한 경험을 아주 잘 살린 소설입니다. 그런 직업적인 경험이 없었다면 십 대 LGBT 청소년의 감정을 그토록 세밀하게 묘사하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LGBT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의 앞글자를 딴 용어로 LGBIT, LGBTAIQ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소수자를 가리키는 퀴어(queer)의 세분화된 분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옮긴이 신소희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편집자 및 번역가로 일하며 <아웃사이더>, <위험한 독서의 해>, <안달루시아의 낙천주의자>등을 번역했습니다.
첫사랑은 블루의 원제는 'Simon vs. the Homo Sapiens Agenda'입니다. 사이먼과 블루는 왜 LGTB만 커밍아웃을 해야되느냐? 백인 양성애자 등 그 모두가 성정체성에 대한 커밍아웃해야 되는게 정상이 아닌가? 사이먼과 블루는 그것을 일러 호모사피엔스 아젠다로 명명합니다.
첫사랑은 블루 줄거리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이먼은 어느 날 우연히 텀블러에 개설된 교내 커뮤니티에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암시하는 블루의 글을 발견하고 그에게 메일을 보냅니다. 그날 이후 사이먼과 블루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성정체성을 확인하며 온라인 썸을 타기 시작합니다.
사이먼은 가족은 물론 학교 친구들도 그의 성정체성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쾌활하고 밝은 십대 청소년입니다. 사이먼과 블루가 주고받는 이메일도 여느 십대 청소년의 연애편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메일이 쌓이는 것과 비례해 사이먼은 점점 치유 불가능한 사랑의 불치병으로 빠져듭니다.
난 블루를 생각한다. 항상 블루 생각뿐이다. 어쩌겠는가, 내 마음이 항상 그쪽으로만 흐르는 걸. 오늘 아침 블루에게서 또 이메일을 받았다. 요새 우리는 거의 매일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블루가 얼마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살짝 겁이 날 정도다.
희한한 일이다. 원래 블루와의 이메일은 내 실제 삶과는 분리된 별개의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블루와의 이메일이 내 삶이 된 듯한 기분이다. 다른 모든 일들은 꿈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139쪽 발췌)
요즘 블로그를 하면서 사이먼과 유사한 감정을 느낍니다. 블로그가 내 삶이 된 듯한 기분이랄까요? 블루와 사이먼이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빠져드는 사랑의 행로를 보며 까마득한 전설처럼 느껴지는 첫사랑의 설렘과 떨림이 회상되었습니다.
낭만적 감성이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나머지 때로 별빛에 빠져들고 더러 달빛에 물들던 한바탕 꿈같았던 청춘. 선드러지게 다가오던 몸짓 하나에, 두리두리한 눈빛 하나에 조바심을 내고 탄식을 하던 그 시절을요.
아무튼, 사이먼이 부주의하게도 학교 PC에서 로그아웃을 하지 않아 같은 연극부 마틴이 블루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캡처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마틴은 그걸 미끼로 사이먼의 절친 애비와 다리를 놓아달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합니다.
그 일을 계기로 사이먼은 협박에 굴복하여 애비와 다리를 놓아줄 것인지 아니면 커밍아웃을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사이먼에게 애비는 너무나 소중한 친구였고 마틴은 병맛인 친구였으니까요.
한편으론 사이먼은 블루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시간이 갈수록 간절해집니다. 블루는 이메일에서 자신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조금도 남기지 않는 아주 치밀하고 소심한 성격이였기에 궁금증은 더 깊어만 갑니다.
사이먼은 실존을 알 수 없는 존재와의 펜팔을 하는 심정이었을까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기는 하냐고요? 아마도 해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실체가 불분명할수록 그 상상은 더 강렬해지고 그리움은 깊어지는 법이니까요.
물론 난 아직 네 이름을 몰라.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그밖에 다른 것들도 전혀 몰라. 하지만 내가 네 진정한 모습을 안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해. 넌 모든 걸 곰곰이 숙고하고 세세한 것들도 기억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언제나, 언제나 옳은 말을 해 주지.
지금 와서 돌아보니 난 너를 생각하면서, 네 이메일을 되풀이해 읽으면서, 널 웃기려고 하면서 참 많은 시간을 보냈어. 이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는 솔직하 나도 잘 몰라. 애초에 이메을 통해 사랑에 빠진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난 정말로 널 만나 보고 싶어, 블루. 한번 시도해 보고 싶어 그리고 널 보는 순간 네 얼굴에 키스하고 싶어지는 것 말고는 다른 시나리오는 상상도 되지 않아. 단지 이 말을 명확히 전해주고 싶었어. 사랑해(289~290쪽 발췌)
결말(스포)
결국 마틴이 사이먼이 게이라는 사실을 교내 커뮤니티에 투척하고 블루에 대한 불치병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사이먼은 블루에 직접 만나자며 용기를 내어 드디어 이메일을 보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였다면 필연적으로 이르게 될 국면으로 사이먼과 블루는 나아갑니다. 서로 만나 보기로! 상상하였던 것과 비슷하게나마 서로가 일치할 확률은 사실 굉장히 낮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도 소설은 아름답게 끝납니다.
아마도 작가 베키 앨버탤리는 LGBT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북돋아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아직은 어리디 어린 사이먼과 블루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제 첫사랑을 막 시작하는 그들에게 가혹할 필요는 없겠지요. 적어도 픽션에서는요.
독후 감상
사이먼의 첫사랑 이야기를 읽으며 사이먼이 참 행복한 청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전한 상식과 교양을 가진 부모, 의좋은 남매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진실한 친구들, 그리고 첫사랑 블루와의 만남까지 이루어내었으니까요.
그 어느 것 하나와도 제대로 된 관계가 없었던 자에게, 세상을 아예 등지고, 현실과 유리된 채 살아가는 고스트에게는 사이먼이라는 캐릭터가 어쩌면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비추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소설은 주인공을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상태로 그렸습니다. 하이틴 로맨틱 소설의 한계이겠지만 모든 걸 갖춘 주인공을 모두가 이해해 준다는 건 아무래도 판타지 세계에서나 가능할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더구나 <첫사랑은 블루>가 주제로 삼은 성 정체성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러브, 사이먼>(2018)입니다.
퀴어 영화 러브, 사이먼
우리나라에는 개봉되지 않았지만 <러브, 사이먼>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만든 첫 퀴어영화입니다. 미국에서는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사운드트랙이 아주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흥행도 좋았는데 어쩐 일인지 관람등급까지 받아놓고 국내 개봉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퀴어 영화에 대한 국내 사정은 할리우드보다 보수적이라고 할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감독 그렉 버랜티는 커밍아웃을 하고 대리모로 아들을 낳았으며 미국 축구 국대 출신의 로비 로저스와 2017년 결혼했습니다. 메이저 스포츠계에서 사상 첫 커밍아웃한 선수입니다. 그가 현역으로 있을 당시 미국 LA 갤럭시팀이 백악관에 초청받아 갔을 때 오바마는 로비 로저스의 용기를 치하했습니다.
<러브 사이먼>이 넷플릭스에 공개되기를 고대합니다. 사이먼과 블루를 과연 어떻게 영상화했을지, 그리고 애비와 레아를 비롯한 친구들이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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