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는 복잡하고 긴 소설을 쓰기 전에 잠깐 쉬었다 가는 기분으로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썼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독자들을 위한 특별판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읽으며 작가 김연수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 특유의 현학적이고 과시적인 소설 속 문장들에는 근대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어휘들이 서낙하게 튀어나옵니다. 서낙하다라는 어휘도 이 소설에서 처음 접했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장난이 심하고 하는 짓이 극성맞다는 뜻입니다.
김연수 작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93년 계간 <작가세계>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주요 작품에는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1994), <꾿빠이, 이상>(2001),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2003), <달로 간 코미디어>(2007)이 있으며 이상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진중한 그의 역사 소설 <밤은 노래한다>(2016)↗가 그의 대표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작가는 하루키처럼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에는 결혼을 하여 유부남이 되고 유부녀가 되는 것에 대한 재미난 비유가 나옵니다. 작가 자신의 결혼관이라고 짐작이 되지만, 적절한 비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남여의 처지를 대치하여 생각한다는 건 그 세대만의 한계가 아닐까 합니다.
"미혼남에서 유부남으로 바뀌는 과정은 달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일과 비슷하다. 유부남이 되면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중력이 여섯 배나 강해진다는 사실에 멍멍해진다.
하지만 달에서 지구로 바로 귀환할 수는 없다. 반드시 무중력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신혼여행이 바로 그런 무중력 공간에 해당한다.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법적인 미혼남녀의 육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탐닉할 수 있는 그 밀월여행은 확실히 무중력 상태와 닮았다.
미혼녀에서 유부녀로 바뀌는 건, 뭐랄까 호두를 깨무는 일과 비슷하다. 애당초 허기진 배를 채우겠다고 깨문 게 아니다. 왜 먹지 않고 놔두느냐는 주위의 채근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게 먹을 게 없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볼썽사나운 껍질뿐만 아니라 초라한 알갱이까지 부수고 난 뒤에야 차라리 그냥 막연하게 상상하던 때가 더 좋았다는 걸 알게 된다."(발췌 인용)
작가는 또 세상 일과 사랑 등을 나이와 등치하여 생각하는 인생관을 내보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일들은 나이 든 사람들이 잘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만은 모험을 겁내지 않는 젊은이들의 전공 분야다. 젊은이들은 아직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군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이 역시 적절한 비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젊은이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습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의 초판이 2003년에 인쇄되었으니 그때는 당연히 백세시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 같지만요.
무엇보다 나이가 들었다고해서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들었다고해서 사랑을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젊은이라고해서 나이 든 사람들보다 세상 다른 모든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줄거리
사랑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광수는 대학교 때 짝사랑했던 같은 과 동기였던 선영이와 마침내 결혼합니다. 그런데 선영이는 광수의 절친이자 같은 과 동기였던 진우의 옛 애인이었습니다.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광수가 결혼식 때 부케로 쓰인 팔레노프시스(호접란)의 꽃대가 부러진 장면을 회상하며 시작합니다.
광수는 경사스러운 결혼식에 팔레노프시스 꽃대가 부러진 일이 신혼여행을 가서도, 또 돌아와서도 신경이 쓰입니다. 그 불길함은 광수 인생을 삼킬 듯한 의심의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 의심의 불꽃은 진우에게로 향하고 마침내 광수는 만취하여 노래방에서 진우에게 선영이와 잤는지, 안 잤는지를 밝히라며 몰아세웁니다.
진우는 선영이가 광수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광수가 의심할만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선영이와 둘이서 만나 술을 마신 진우는 선영이와 자려고 자신의 원룸에까지 선영이를 끌어들였습니다. 잠시 진우의 변명을 들어볼까요?
"사랑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혼자서 곱씹어야만 했던 기억이 필요했다. 영수증이 없다면 한때 위대한 사랑을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법이다. 사랑했던 기억이 없었으니 사랑도 없었던 것이며, 아울러 한 번도 선영에게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선영이를 사랑했다는 영수증이 진우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작가는 사랑은 가도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남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여행지에서 그때 그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인증샷 찍기에 여념 없는 여행자와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진우는 노래방에서 예의 유창한 말주변으로 위기를 빠져나오고 광수는 세상에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차차 깨닫게 됩니다.
에필로그
타고난 이야기꾼이 하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재미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았습니다. 2000년 여성포털 사이트 "마이클럽"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광고 "선영아 사랑해"를 패러디한 듯한 제목부터 마음에 걸리적거렸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아래와 같은 비유도 너무 진부합니다.
"난 후일담 소설만 보면 형상기억 브래지어가 생각나. 세탁기에 돌리면 일반 브래지어가 좀 상하듯이 사회에 나가면 적당히 망가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많거든."
이보다는 조금 더 신선한 문장들이 숨쉬는 소설들을 읽고 싶습니다. 타고난 이야기꾼의 소설보다 진지한 작가의 작품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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