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를 충격에 빠트린 화제작
모니카 벨루치와 벵상 카셀이 주연으로 출연한 <돌이킬 수 없는>(2002)는 잔인한 폭력장면으로 영화사에 기록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현재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상영시간 1시간 37분, 관람등급은 청불입니다.
2002년 칸 영화제에서 <돌이킬 수 없는>이 상영되었을 때 몇몇은 구토 증세로 병원에 실려갔고 민감한 관객들은 관람을 포기하고 도중에 나가버리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어지러운 화면과 사이키 조명, 사이렌 소리, 그리고 신경을 긁는 듯한 불쾌한 저주파 음악 등은 참기 힘든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후반부로 달려갈수록 음악도 조용해지고 회전하는 화면도 점차 안정되며 부드러워집니다.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
<돌이킬 수 없는>에 출연을 제의를 받은 뱅상 카셀은 당시 아내였던 모니카 벨루치의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단번에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모니카 벨루치가 맡은 알렉스 역이 지하도에서 끔찍하게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되는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니카 벨루치가 존경하는 가스파 노에 감독의 작품이라고 뱅상 카셀을 졸라 출연하게 되었는데요. 지하도 촬영 후 모니카 벨루치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후유증이 컸다고 합니다.
모니카 벨루치는 영화 <라빠르망>(1996)에서 뱅상 카셀과 호흡을 맞춘 후 1999년에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고 2013년 둘은 이혼했습니다.
가스파 노에 감독
<돌이킬 수 없는>을 만든 가스파 노에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영화 감독으로 폭력적인 영화로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일곱 살 때 스탠리 규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고 영화감독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가스파 노에 감독은 돌이킬 수 없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역순으로 보여줍니다. 사건의 결말부터 보여주고 시간의 역순을 따라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방식의 시나리오를 선택했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인간에게 잠재된 폭력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시간 구성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몇번 본 후에는 인간 운명은 한 긋 차이, 그 필연성을 강조하는 장치로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후 <돌이킬 수 없는>는 2019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어 시간 순서에 맞게 새로 편집한 스트레이트 컷을 상영하였습니다. 스트레이트 컷을 보면 아마 또 다른 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돌이킬 수 없는>는 편의상 시간 순서대로 줄거리를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혹 영화를 보고 싶은 분들은 영화를 보신 후에 스포 부분은 보시기를 바랍니다. 줄거리를 알고 보면 디테일한 부분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줄거리
알렉스와 마르쿠스의 침실
연인 알렉스(모니카 벨루치)와 마르쿠스(뱅상 카셀)는 친구 피에르(알베르 뒤퐁텔)의 전화소리에 잠에서 깨어납니다. 차가 고장 났으니 지하철을 타고 파티에 가자는 피에르의 목소리를 자동응답기가 들려줍니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침대에 전라로 누운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을 보는 관객들은 실제 스타 부부의 적나라한 부부생활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모니카 벨루치는 뱅상 카셀 위에서 잠이 깨며 꿈을 꾸었다고 말합니다. 긴 터널이었는데, 갑자기 터널의 길이 둘로 갈라졌다고. 혹, 애인을 침대 삼아 숙면을 취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조금 무리가 있는 자세이긴 합니다.
아무튼 알렉스와 마르쿠스는 옷을 입지 않은 채 커피를 마시고 달콤한 사랑을 나눈 후에 샤워를 합니다. 욕조 비닐을 사이에 두고 키스하는 장면은 차양 효과를 발휘하며 에로틱한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마르쿠스가 술을 사러 나간 사이 알렉스는 임신진단시약으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감동하는 듯 혼자 웃습니다.
이어서 벽에 걸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포스터를 비추고는 카메라는 곧장 회전하며 하늘로 솟구쳐 잔디밭에 누워 있는 알렉스를 비추고 아이들이 스프링클러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영화는 끝납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며
알렉스와 마르쿠스는 피에르를 만나 파티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주로 성적인 주제로 도배된 이야기를 지하철 안에서도 거리낌이 없이 떠듭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역시 파리!라고 할 정도로요. 거기다 피에르는 알렉스의 전 남친이었는데 마르쿠스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환락의 파티룸(스포)
파티에 도착한 마르쿠스는 어쩐 일인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여성들에게도 치근대고 파티룸에서 환락의 춤을 추기도 합니다.
마르쿠스의 행동에 실망한 알렉스는 15분 먼저 파티 장소를 나와 혼자 집으로 향합니다. 데려다주겠다는 마르쿠스의 손을 거세게 뿌리진 채.
여기까지는 이들 연인에게 별반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파티에서 누구나 술에 취할 수도 있고, 거기에 실망하여 먼저 가는 연인들도 허다하니까요.
지하도에서
알렉스는 길을 나와 머뭇거리다 지하도로 들어섭니다. 휑뎅그렁한 지하도가 음침하기조차 합니다. 알렉스의 꿈은 예지몽이었을까요? 터널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는.
지하도 중간쯤에서 깡패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여자를 알렉스가 어쩔 줄 몰라하며 보는 사이, 그 여자는 운 좋게도 도망을 치고 대신 알렉스가 깡패에게 잡혀 성폭행을 당합니다.
게이였던 깡패가 알렉스를 강제로 폭행하는 장면은 롱테이크로 정지화면처럼 15분 정도 계속됩니다. 긴 시간 동안 대사 한마디 없이, 움직임도 거의 없이 끔찍한 상황을 연기한 모니카 벨루치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시퀀스입니다.
차마 두 눈 뜨고는 도저히 쳐다볼 수 없는 잔인한 장면, 연이어 사체처럼 널브러진 알렉스에게 가해지는 폭행장면은 인간의 악마성에 치떨리게 합니다.
클럽 렉텀
마르쿠스와 피에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알렉스를 목격합니다. 꼭지가 돈 마르쿠스는 알렉스를 저지경으로 만든 범인을 잡기 위해 게이 클럽 렉텀으로 향합니다.
오로지 복수심에 불탄 마르쿠스는 렉텀에서 여러 놈에게 차례대로 시비를 걸고, 어이없게도 엉뚱한 놈을 범인으로 오인하여 싸우던 중 오른쪽 팔이 탈골되어 오히려 성폭행 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이성을 찾으라고 줄곧 말려왔던 피에르는 그 순간 소화기를 집어 듭니다. 그리고는 그놈의 얼굴에다 소화기를 내려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얼굴이 끔찍하게 함몰되는 이 극악한 장면은 그 후 폭력적인 영화에서 수없이 패러디된 것 같습니다.
각자의 길로
피에르는 경찰에 연행되고 알렉스와 마르쿠스는 병원으로 실려갑니다. 그 후 영화의 오프닝에 해당하는 발가벗은 한 노인이 중년의 사내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거 알아? 시간이 모든 걸 파괴한다 거"
그러자 마주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살이가 그렇잖아. 별거 아닌데 자잘한 일 갖고도 비극이니 뭐니 떠들잖아. 남는 건 쾌감과 기쁨뿐이지."
에필로그
모르겠습니다. 마르쿠스와 알렉스, 그리고 피에르의 비극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요. 기나긴 잠을 자는 척했던 비극이라는 불꽃이 발화되는 지점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알렉스가 귀갓길로 지하도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15분 먼저 나서지 않았더라면, 마르쿠스가 만취하지 않았더라면, 그것도 아니라면 마르쿠스와 사귀지 않고 그냥 피에르의 여자 친구였다면 비극은 발화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렉스와 마르쿠스, 피에르는 딱히 잘못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도 비극이 순식간에 그들 삶을 덮쳐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명은 한 긋 차이다라는 말이 있을까요?
어쨌든 우리 인생은 그러한 것 같습니다. 하여 영화 <돌이킬 수 없는>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봐도 후회, 안 봐도 후회가 될만한 영화. 평론가들은 굳이 그렇게 잔인한 폭력장면을 묘사할 필요가 있었냐고 혹평합니다.
글쎄요? 우리 인생에도 불필요한 장면들이 충분히 많다는 걸 떠올려보면 감독으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평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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