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뭔가를 진짜 열심히 해본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몰려올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게 있긴 있었나 하는 까마득한 탄식. 백원달의 <인생의 숙제>는 그런 날에 잔잔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그린 만화다.
<인생의 숙제>는 2020년 11월 16일 초판 발행됐고, 2021년 3월 10일 1판 5쇄로 2만 부를 인쇄했다. 서른셋 직장 여성이 반짝거리는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잔잔한 이야기에 이삼십 대 여성들이 반응했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어른이 되어가고 싶다는 작가 백원달은 <국내 유량기>와 <나 홀로 유럽>, <소녀가 여행하는 법>을 출간했고 웹툰 플랫폼 코미카에서 <작심삼일 운동툰>을 연재했다. <화가 살리에르>로 2020년 네이버 웹툰 지상 최대 공모전에서 2기 장려상을 받았다.
20화로 이루어진 <인생의 숙제>는 11년차 직장인 박유나가 주인공이다. 출근도 안 했는데 벌써 퇴근하고 싶어지는 직장 여성. 어릴 적에는 어른이 되면 반짝반짝 빛나는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11년 차인데도 직장에서는 여전히 홍진숙 팀장에게 갈굼을 당한다.
다행히도 마음이 여린, 아기 같은 유나를 위로해주는 직장 선배가 있다. 최미경 대리.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꿈이었던 최미경 대리는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졸업 후에도 돈보다 그림이 좋아 파트타임 알바를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몇 번이나 전시를 했지만 단 한 작품도 팔리지 않았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고 있을 때 그녀는 운 좋게 사무직으로 취직했다.
딱 1년만 더 돈 벌고 다시 그림을 그리리라 다짐했지만 그렇게 8년이 흘렀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결혼하면 다시 그림을 그려야지, 아이가 좀 자라면 다시 그림을 그려야지, 꿈을 꾸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학원비에, 아이를 돌봐주는 시어머니 생활비에 그림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한편, 박유나는 옷장 정리를 하다 초등학교 때 들고 다니던 실내화 가방 안에서 6년 동안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어린 날의 유나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그 꿈을 포기하고 전문대에 진학하고 빨리 취업한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혼자 어렵게 살고 있는 어머니를 돕기 위한 거였다.
유나는 대기업에 다니는 김철민과 3년째 사귀고 있지만 왠지 그와 맞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김철민은 매우 현실적이다. 유나가 "너는 나를 사랑하니?"라고 물을 때마다 철민은 그 물음의 의미를 모른다.
김철민은 몇 번의 연애를 했다. 스무 살에 만난 첫사랑 지혜를 가장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스물여섯 살에는 희진을 만나 3년 동안 별 탈 없이 연애했지만 결혼 앞에서 깨졌다. 그리고 서른 살에 유나를 만났다.
철민은 생각한다. 내가 서른셋에 지혜를 만났다면 지혜와 결혼했을 거고, 서른셋에 희진이를 만났다면 희진이와 결혼했을 거라고.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라 결혼할 때 만난 사람과 한다는 걸 모르는 유나가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유나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맞지 않는다는 걸, 마음이 식었다는 걸. 3년의 연애. 이 사람과 헤어지면 외롭겠지. 하지만 이 사람과 평생 함께 한다면 평생 외로울 거야.
그리고 유나는 그의 손을 조용히 놓는다. 철민이가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니었기에 이별의 후폭풍에 괴로워하던 유나는 연애의 실패도 앞으로의 성장에 거름이 되리라 믿으며 다시 일상을 찾아간다.
그로부터 5개월 뒤, 유나는 집에 돌아오면 시를 쓰고 SNS에 올린다. 용기를 내어 도전했던 공모전에는 떨어졌지만 시를 매일 쓰며 반짝거리던 진짜 자신을 찾아간다.
박유나가 SNS에 올린 시
차가운 눈송이는
따뜻한 물방울이 되어
볼을 따라 흐른다.
눈물이다.
눈물은 왜 따뜻한가.
유나의 친구들에게 인생의 숙제는 결혼과 육아였다. 해가 지는 황혼을 바라보며 예쁘다며 감동하는 유나의 인생 숙제는 뭘까? 누구에게나 인생의 숙제는 있을 것이다.
<인생의 숙제>는 제목에서 보듯 수동적이고 나약한 이야기로 읽힌다.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젠더 감수성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인생의 숙제는 일상에 지친 하룻밤에서나마 잔잔하게 위로받을 수 있는 공감 만화다.
요즘 이렇게 두리뭉실하게 신파적인, 실개천에 흐르는 물처럼 얕은 이야기들을 나도 모르게 찾게 된다. 치열하고 무거운 이야기들을 감당해 낼 에너지가 내 인생에서 어느새 다 고갈되었기 때문이리라.
아, 그리고 철민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결혼할 때 만난 사람과 이루는 가정은 그냥 드라이하게 경제공동체라고 불러야 된다는 것을. 구성원들간의 호칭도 여보, 당신이 아닌 사장이나 기껏 친구 정도로 불러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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