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와 남궁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2020년 연말부터 2021년 5월까지 문학동네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된 이슬아와 남궁인이 주고받은 서간문이다. 일종의 기획 서간문인 셈이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작가들의 왕복서간을 엮는 서간 에세이 시리즈를 펴내고 있는데, 반응이 괜찮은 편이다.
이슬아 작가는 팬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일간 이슬아>로 연재 노동자가 되었고, 지금은 헤엄 출판사 대표다. 이슬아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90년대생을 대표하는 에세이스트가 되었다. 이슬아에 대한 프로필은 아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슬아 수필집 새 마음으로
의사 남궁인
반면, 의사 남궁인은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1983년생인 남궁인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취득, 현재는 이대목동병원 임상조교수로 재직 중으로 이대목동병원 응급실에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남궁인 역시 <제법 안온한 날들> 등 여러 권의 에세이집을 펴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라는 제명 역시 이슬아와 남궁인의 삶의 배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해에 착안해 짓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슬아의 말대로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한 법이니까. 이슬아의 글은 많이 접해서 익숙한데, 남궁인의 글은 처음이라 생소했다. 오글거리는 데도 많았다.
서간문 집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이슬아가 주로 남궁인에 대하여 알아가면서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슬아가 인터뷰어이고 남궁인이 인터뷰이로 비치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이슬아는 언제나처럼 솔직 담백하게 치고 들어가고 남궁인은 뭔가 지나치게 관념적인 세계에 숨어드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슬아와 남궁인이 주고받은 편지들
이슬아가 불안과 공포로 두려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의사로서 조언을 부탁하자, 의사 남궁인은 갑자기 먹는 약이나 좋은 정신과 의사보다는, 누군가 와락 안아주는 일 같은 것이 우리의 불안을 잠재우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계속 이겨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패배하고 가끔 승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다시 패배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삶은 눈물 나는 일입니다."
이슬아에게 하는 남궁인의 조언은 얼핏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문학청년이나 할 법한 감상적인 대답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주 무책임하고 위험한 대답이 될 수 있다. 불안과 공포, 우울증이 심한 사람은 누군가 와락 안아준다고 해서 불안이 잠재워지지 않는다.
불안과 공포, 우울증 또한 다른 질환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전문의를 찾아 정확하게 진단받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질환이기 때문이다.
의사 남궁인의 글을 보면 응급실 상황이 많이 스케치된다.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사는 응당 힘들고, 말로 다하지 못할 고충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사 남궁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응급실을 처절한 불행의 섬이라고 묘사한다.
물론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데, 그래도 조금 지나친 느낌이 든다. 병원 밖 보통 사람들은 행복한 날들이라는 걸 그는 어찌 아는 것일까, 라는 의문도 든다.
의사 남궁인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도 사랑은 작성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 언명 역시 문청이나 할 법한 낭만적인 감성 과잉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현실감각 제로의 낙원에 사는 사람 같다. 아, 물론 진정한 사랑이라면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할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슬아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가면서까지 사랑을 작성할 필요는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의사 남궁인보다 이슬아가 열 살이나 어리다. 그럼에도 이슬아는 사랑에 있어서도 현실적이다. 왜일까? 살아온 궤적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랑도 밥을 먹고 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이슬아는 살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이슬아는 고백한다. 열 번 가까이 긴 편지를 주고받아도 의사 남궁인의 불행과 행복은 여전히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진다고.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의사 남궁인은 어떤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는 글을 쓸 때에도 전부 울면서 적었다고 고백했다. 혹시, 사람이 정녕 슬프면 눈물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 한 번이라도 겪어보지 못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봤다. 눈물이 너무 많아도 가식적으로 비칠 데가 있다.
그러도 보니 의사 남궁인이 겪었던 슬픔들은 자신의 슬픔이 아닌, 모두 응급실 환자들의 슬픔이었다. 그는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자신의 슬픔으로 삼았다. 이슬아와 남궁인 사이에, 독자와의 오해도 발생하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이슬아는 남궁인에게 두 번째로 보내는 편지에서 제목을 이렇게 적었다. "느끼하지만 고마운 남궁인 선생님께" 나는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다 읽고서도 의사 남궁인에 대한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 다만, 우리 사회에 누군가 해야 할 응급실에서의 고된 업무를 수행하는데 대한 고마움이 남을 뿐이다.
작가 이슬아의 팬이다 보니 이 글이 매우매우 이슬아 편향적으로 작성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처음 알게 된 의사 남궁인에게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쩨쩨하게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작성되었음도 인정한다. 혹시 의사 남궁인 선생께서 보신다면 눈감아 주시기 바란다. 작가 이슬아와 의사 남궁인 사이에 탄탄하게 구축된 서간문의 우정에 질투를 느껴 이 글을 작성하였음도 고백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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