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중의 <삼국지 통속 연의>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고전에 오른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어린 시절 삼국지를 소재로 한 만화나 드라마, 영화를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라 생각됩니다.
마치 전설이나 신화 속의 한 장면 같은 도원결의로 시작하는 삼국지 연의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특히, 아시아인들의 무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도원결의를 흉내낸답시고 우쭐거리던 애들의 얼굴도 갑자기 떠오르네요)
오죽했으면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자와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말까지 생겨난 것을 보면요. 그런데 이 말도 조금 어폐가 있는 것 같아요. <삼국지>는 세 번 이상 읽지 않으면 그 의미를 충실히 이해할 수 없는 고전이기도 하니까요.
장맛비 쏟아지는 여름 방학이나 눈이 펑펑오는 겨울 방학이 되면 삼국지를 읽곤 했었는데, 삼국지를 읽은 날에는 꼭 희뿌연 먼지 날리는 전장의 꿈을 꾸곤 했습니다.
삼국지가 무의식의 깊은 층을 파고드는 이야기의 힘을 지녔다는 걸 실감했다고나 할까요?
어린 시절 친구 집에 갔다가 양장으로 된 삼국지 전집(10권)을 보고 삼국지 전권을 처음으로 제대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시집갈 때 가져갈거라 고이 모셔둔 삼국지였는데, 시집갈 때 왜 삼국지를...
아마도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였던 거 같은데 그 뒤로는 본 적이 없어 기억이 가물하긴 합니다.
그 뒤로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10권)를 보고 매료되었는데, 이문열의 <삼국지>는 그가 문화권력을 누리며 꼰대로만 일관하는 걸 보고 깨끗하게 재활용 처리한 흑역사가 있습니다.
통상 삼국지의 수명은 10년 정도되는 것 같아요. 삼국지만큼 많은 편역자의 손을 거친 작품도 찾아보기 어렵는데요.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박종화, 정비석, 김홍신, 이문열, 황석영, 최근엔 박기봉의 삼국지가 그 대를 잇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삼국지 번역본이 있습니다.
그 당시 압도적이었던 이문열의 <삼국지>는 폐기 직전, 다시 읽어보았을 때 편역자의 잡다한 횡설수설들이 눈에 거슬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새로운 평역자가 나타나 시대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삼국지'를 번역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삼국지 10권을 읽는 것은 확실히 시간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일단 손에 잡으면 놓기 어려우니 다른 많은 일들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쁜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읽기에 부담 없는 한 권짜리 <삼국지>를 소개합니다. 한 권이긴 하나 '삼국지연의'의 핵심적인 사건들은 거의 빠트림 없이 압축해 큰 줄거리를 파악해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습니다.
다만, 10권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압축해 놓았으니 소설 읽는 묘미는 많이 없습니다. 2010년에 도서출판 문장에서 펴낸 남종진, 이향규 편역의 <삼국지>입니다. 한 권짜리이기는 하나 쪽수가 640이니 이도 만만치 않지만요.
한 권짜리 삼국지를 맛보고 삼국지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아요.
삼국지는 읽을 때마다 등장인물 중 좋아하는 주인공들이 매번 바뀌는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한데요.
삼국지를 처음 접하면 유비와 관우, 장비를 흠모하게 되는 것이 보통인 것 같아요.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 유비보다 제갈량이 더 위대해 보이다가도 조조가 최고의 영웅이 아니었을까라는 제각각의 결론에 나름 도달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떨 땐 장비가 한없이 불쌍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탁현'이라는 시골 바닥에서 난데없이 유비와 관우를 만나 따거로 모시면서 주야장천 고생만 하다 허접한 솔하 병사에게 황천길로 가고 만 그의 삶이 고단하게만 보이니까요.
"침실 안에 이르러 장비를 보니 그는 둥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꼭 쳐다보는 것 같아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장비는 원래 눈을 뜨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곧이어 장비의 코 고는 소리가 우레같이 났다.
그제야 두 놈은 안심하고 함께 달려들어 장비의 배를 찔렀다. 장비가 외마디 소리 크게 지르지 못하고 죽으니,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 남종진, 이항규 편역, <삼국지>(나관중 지음, 문장, 2010) pp 464-465
(오늘 편집하다 보니 인용을 선택하는 메뉴가 사라져 버렸네요.ㅠㅠ)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요? 장비를 찌른 두 놈은 점강, 장달이라는 두 하급 장수였는데요. 장비가 관우의 죽음에 비분강개한 나머지 부하들을 닦달하다 당한 참변이었습니다.
<삼국지>는 영웅호걸들과 미색들의 한바탕 꿈같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읽는 이의 처지와 정서에 따라 연애소설로 읽히기도 하고, 허망한 이야기로도 읽히기도 합니다.
이게 <삼국지>를 거듭 읽는 묘미가 아닐까 합니다. 언제 시간이 되면 박기봉의 삼국지(12권)를 읽고 추억의 그 바다에 빠져봐야겠습니다.
영국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있었다면, 중국에는 나관중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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