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이 개봉한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로 데뷔한 윤종빈 감독의 세 번째 영화예요.
극장에서 정말 재미있게 본 영화였었는데,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걸 보고 옛 추억을 더듬으며 다시 한번 봤는데, 한국 누아르의 금자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시한번 아~ 탄식했습니다.
최민식과 하정우의 강렬한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개성강한 조연들의 아우라도 어머어마했던 범죄와의 전쟁, 아마도 시나리오 작가와 연기자를 꿈꾸는 친구들이라면 이 영화를 교과서처럼 탐독하고 있을 것 같은 영화입니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1980년대 나쁜놈(그들도 처음에는 분명 좋은 놈들이었을 거예요)들의 뒤틀린 욕망이 한바탕 꿈처럼 휘몰아친 영화라고 할까요?
범죄와의 전쟁 줄거리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부산, 시대적 배경은 1982년부터 1990년까지예요. 엔딩 장면은 2012년 2월까지 퀀텀 점프하지만요.
뇌물 비리 공무원 최익현(최민식)은 부산세관에서 해고되자 자신이 적발했던 히로뽕을 빼돌려 일본 야쿠자에게 팔아먹어요. 최익현은 히로뽕을 팔아먹기 위해 부산 조직 폭력계의 보소 최형배(하정우)와 손을 잡게 되는데요.
일개 말단 비리 공무원이었던 최익현이 어떻게 조폭 보스와 손을 잡았을까요? 최익현은 형배를 처음 만났을 때 첫마디로 이렇게 묻습니다.
"실례지만 어디 최씹니꺼?"
여러분이 만약 양반 가문 후손이라면 이런 질문 한 번쯤은 받아보셨을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웬만하면 성씨로 교통정리가 다 된다는 걸 익히 알고 계시지요?
확률적으로는 여덟 단계를 건너면 인간은 어떻게든 엮이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최익현과 최형배의 촌수는 계산하기 어려운데 일단, 최민식의 명대사를 한번 들어보시고 익현과 형배의 관계를 직접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느그 아부지, 우리 형님의 할부지의 9촌 동생의 손자가 바로 익현씨인기라"
어때요? 감이 잡히시나요? 어? 9촌 동생은 성립될 수 없는 데? 하시는 분은 일단 양반 가문으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최익현은 우리 형님의 할부지의 9촌 동생의 손자를 미끼로 조폭계의 대부가 됩니다.
최익현은 최형배와 손을 잡음으로써 부산 조폭계의 "대부"로 급상승됩니다. 최익현의 “동물적인 생존본능”이 공무원의 세계보다 어둠의 세계에서 더욱 빛을 발했던 것이랄까요?
최익현은 ‘경주 최 씨 충열공파 35대손’을 무기 삼아 같은 최 씨인 최형배를 손자뻘로 만들고, 검사와 안기부로 그 인맥을 서서히 넓혀 가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요?
혈연, 학연, 지연을 총동원한 뇌물 공세로요. 최익현의 뇌물공세를 보면 타고난 로비스트가 따로 없습니다.
1980년대는 뇌물로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었던 시대랄까요?(지금도 그렇다고요?) 그 당시에 공무원이 깐깐하면 나쁜 공무원이었습니다.
머리 아프게 법정 서류를 다 갖추게 하는 것보다는 적당히 내물 받고 처리해주는 공무원이 유능하고 서비스 정신 투철한 친절 공무원으로 대우받았습니다(정말로요)
어쨌든 배우 최민식은 뇌물을 뿌리는 자의 심정을 어떻게 그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연기를 잘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최익현은 나이트클럽이 돈이 된다는 걸 알고 한때 형배의 꼬봉이었던 판호(조진웅)가 독립하여 운영하는 나이트클럽마저 손에 넣으려고 합니다.
이때 주먹밖에 모르던 형배가 고민하며 내뱉은 한마디는 한국 영화사의 명대사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정우가 다방 레지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내뱉은 "살아 있네"와 함께 배우 하정우의 인생 명대사가 되었습니다.
"대부님, 명분이 있어야 한다 아입니까? 명분이"
약싹 빠른 익현은 머리 쓸 줄 모르는 형배에게 명분을 만들어주며 나이트클럽을 접수하지만 그 과정에서 호텔 마담(김혜은) 폭행죄로 형배와 연행되고 맙니다. 여기서도 형배의 동물적인 감각은 빛을 발합니다.
(수갑을 찬 손으로 신참 형사를 세게 후려친 후에)
"느그 서장 어딨어! 강 서장 대꼬와아. 니이...? 내 누군지 아나? 으이~!
내가 이 섀꺄, 느그 서장이랑 임마아.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으어?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랑 인마, 어저께도 같이 밥 묵고, 으! 싸우나도 같이 가고 으!
마아, 개이 섀꺄 마 다했어!
이 섀끼들이 말이야, 개섀애끼이들"
만약 최형배의 개뻥 수법을 위급하실 때 써먹으시려면 (제가 해봤었어 잘 아는데) 그냥 친분을 내세우면 백퍼 안 먹힙니다. 이 새끼가 돌았나? 이럽니다.
먼저 말보다 행동으로 기선 제압하는 것이 젤 중요합니다. 형배는 비록 수갑을 찼지만 상대방을 일거에 기 죽이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동물이었습니다. 경찰서에 연행된 인간이 형사를 후려칠, 그것도 수갑을 찬 채로 후려칠 배짱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최형배는 수갑 찬 채로 기선을 제압하고 난 후, 서장과의 친분을 과시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상대의 자존을 완전히 짓밟는 타격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현타(한국사회는 권력자와 친밀감 정도가 서열을 결정한다는)가 오게끔 만드는 마법이 있습니다.
아, 이 인간이 보통 인간이 아니구나! 나보다 더 서장과 친하니 내 위구나! 그러니 신참 형사가 꼬리를 내릴 수밖에요. 그런데 만약 배테랑 형사라면? ㅎㅎ 그땐 다른 고도의 방법을 모색해야지요. 그건 차차 다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그렇게 죽이 잘 맞았던 익현과 형배도 어느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하는데요. 바로 수컷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열다툼에서 비롯됩니다. 머리 쓰는 익현이 자꾸만 주먹 쓰는 형배를 깔보기 시작하는 순간 형배가 발끈했다고 할까요?
그 와중에 1990년 10월 13일, 당시 (망할!)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지가 범죄이면서 말입니다.ㅜㅜ) 최익현은 그때에도 본능적으로 최형배에게 원한이 많았던 김판호(조진웅)에게 양다리를 걸쳐 살 길을 도모합니다.
범죄와의 전쟁 결말
그것이 화근이 되어 최익현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형배 조직의 넘버 투인 창우(김성균)에게 거의 죽임을 당할 뻔합니다.
그러나 최익현이 누구입니까? 판호와 손을 잡았던 익현은 판호는 말할 것도 없고 형배까지 모두 짬짬이로 검사(곽도원)에게 팔아넘깁니다. 배신의 장미 중에서도 킹왕짱이라고 할까요? 그 시대 우리의 부모들은 어쩌면 모두 그렇게 생존해야만 했는지도 모릅니다. ㅠㅠ
그리고 영화는 2012년 2월, 부산의 유명 재력가가 된 최익현이 호텔에서 손자 돌잔치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엔딩 시퀀스이지요.
미루어 짐작컨대 간신히 살아난 최익현은 자신의 생존전략을 재검토했던 걸로 보여요. 최익현은 조폭의 먹이사슬 위에 자리한 거대한 포식자, 그물망을 한 손에 잡고 흔드는 권력의 정점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권력!
최익현은 국가권력에 기생하는 것을 자신의 최종 생존전략으로 수정합니다. 그리고 맏아들은 아버지의 소원대로 검사가 됩니다.
그리고 익현은 맏아들이 낳아준 손자 돌잔치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최익현의 욕망은 맏아들을 통해 거의 성공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영화 <범죄와의 전쟁>은 끝납니다.
범죄와의 전쟁 명대사들
"대부님" 그리고 "살아 있네."(하정우)
"이기 십억짜리 전화번호부다, 십억짜리... 그 새끼들 내 절대 몬 잡아넣어."
(최민식)
"마~, 불 함 붙이봐라."
(하정우가 판호에게 옛날처럼 담뱃불 붙이라며)
"넌 내가 그냥 깡패라고 하면, 그냥 깡패야. 이 새끼야. 표정관리 잘해. 괜히 술맛 떨어지게 씨X 티내지 말고..."
(곽도원 검사가 최익현에게)
"난리났네 난리났어! 어디 오빠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박영선)
최민식이 예비 매제 마동석에 명품시계를 주자 처 박영선 배우의 한탄어린 대사
"자 드가자~!"
"사람 속이 넓고... 큽니다. X도 크고 "
"오빠야, 쫄았제?"
범죄와의 전쟁 에필로그
이처럼 <범죄와의 전쟁>은 누군가의 아버지를 통해 1980년대의 부산을 돌아보고, 누군가의 아들로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에게 생존 앞에 치열했던 그 세대의 적나라함을 가감 없이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공과의 판단은 보는 이들의 몫이겠지요.
성공했던 영화들이 으레 그렇듯이 <범죄와의 전쟁> 또한 조연들의 연기가 발군이었습니다. 부패 검사 역을 맡았던 곽도원의 연기는 정말 징글징글했습니다.
아~ 그리고 김혜은! 호텔 마담 역을 맡았던 김혜은은 연기만큼이나 어눌하면서 거센 부산 사투리의 대사가 압도적이었습니다.
(19금이라 대사가 좀 찰집니다. 이 대목부터는 마아 얼라들은 인생 똑바로 살라카믄 함부래이. 얼라들은 짐부터 눈감아~)
"얼라 X지에 붙은 밥알 따묵는 소리하고 쳐~자빠졌네, 이 개새끼가. 뭐? 야아~, 니 어데 식순이 앞에서 행주 짜노? 이 씨X놈이... 뭐 삥땅? 누가 치데? 니가 치데 이 씨X놈아!"
개인적으로는 마담 김혜은이 찰지고 거친 명대사를 날리는 장면들도 범죄와의 전쟁 명장면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김혜은은 1974년 부산 금정구 출신으로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1997년 김주하, 방현주와 함께 MBC 아나운서로 입사했고 2004년 퇴사할 때까지 뉴스데스크 메인 기상 캐스트로 활동했고, 이 영화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조직의 이인자, 창우역으로 나왔던 김성균은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의 강렬한 연기로 이후 탄탄대로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이웃 사람>(2012)에서 바로 주연을 꿰찼으니까요.
무엇보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미덕은 다른 조폭 영화와는 달리, 조폭에 대한 미화나 그 흔해 빠진 격투씬 하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와의 전쟁은 그 어떤 조폭 영화보다도 더 조폭의 세계를 공감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가 아주 오래된 것 같지만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아직도 교수를 할려면 해외유학은 기본이고, 페이를 조금이라도 더 받을려면 석박사를 따야하고, 빠른 승진을 바란다면 인맥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한다는 자기계발서가 횡횡하는 걸 보면 <범죄와의 전쟁>이 옛날처럼 그리고 있는 1980년대나 지금이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절망감이 듭니다.
아무튼, 엔딩 시퀀스에서 "대부님~"이라는 대사에 곧 속편이 나오겠구나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언제가 나올 범죄와의 전쟁 2를 기대해 보면서 이만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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