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개봉한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가 상영되고 있을 때, 어두운 객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조용히 들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전범으로서 역사의 심판을 받고 있던 '한나'가 공허한 눈으로 관객을 응시할 때, 차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줄거리의 외피만 보면 나이 어린 고등학생을 유혹한 나이 많은 여자의 추한 연애담으로 들리지만 이 영화가 주목하는 층위는 그보다 훨씬 깊은 한 여성의 무의식의 심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독일 영화협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작한 이 영화는 감독은 스티븐 달드리가 맡았고 케이트 윈슬렛이 한나 역을, 데이빗 크로스가 소년기 마이클 역을, 랄프 파인즈가 성년기를 맡아 호연했습니다.
러닝 타임 123분으로 긴 편에 속하고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입니다. 정사신은 크랭크인 당시 미성년이었던 데이빗 크로스가 성인이 될 때를 기다려 가장 마지막에 촬영되었습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줄거리
소년과 중년 여성이 빠져든 사랑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의 독일, 비가 몹시도 쏟아지던 어느 날 열다섯 살 소년 마이클은 열병에 걸려 거리에서 심한 구토를 합니다. 마이클과 우연히 마주친 한나(케이트 윈슬렛)는 그를 도와 집까지 바래다주는데요.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만남은 곧장 육체적인 사랑으로 빠져듭니다.
한나는 사랑을 나누기 전, 언제나 마이클에게 먼저 책을 읽어 달라고 합니다.
소년은 한나에게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D. H. 로렌스의 <차타레 부인의 사랑>,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등을 읽어주기도 하고, 자전거 여행을 함께 떠나기도 합니다.
목록을 적어봏고 보니 주인공들의 미래를 암시하듯 불륜을 소재로 한 연애소설들이 되었네요.
한나는 전차 검표원에서 관리직으로 승진하게 되자 갑자기 직장을 옮기겠다며 마이클의 생일날 싸우고는 한마디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법정에서 재회하는 연인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세월이 훌쩍 흘러 법대생이 된 마이클(랄프 파인즈)을 비춥니다. 마이클은 2차 세계대전 전범 재판장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크라카우 근교의 작은 수용소에서 2년 동안 여성 경비원으로 일했던 죄목으로 기소된 한나를 우연히 목격합니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마이클이 왜 열차 후미로 타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한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부세계와, 인간의 세계와 철저하게 고립된 삶을 살아온 자의 얼굴이기도 했습니다.
한나의 트라우마는 법정에서도 계속됩니다. 한나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세상에 드러나는지에 대해서만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판사가 “승진까지 했는데, 왜 지멘스 회사를 그만두고 친위대에 들어갔냐?”고 다그치자 한나는 "무엇이 잘 못 되었습니까? 판사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라고 되묻는 한나의 표정은 그녀의 트라우마를 대변해주는 명장면입니다.
법정에서는 아우슈비츠 친위대 교도관으로 일하며 저질렀던 한나의 죄목이 하나하나 서술됩니다.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소녀를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일, 교도소가 화재에 휩싸였을 때 수감원을 풀어주지 않아 많은 유대인들이 사망한 일들이 밝혀지는데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당당한 태도에 마이클은 한나가 문맹임을 비로소 알아차립니다.
다시 시작되는 소박한 연정
카메라는 다시 세월이 흘러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고 딸 하나를 둔 중년의 마이클을 비춥니다.
마이클은 그 옛날처럼 책을 읽고 녹음한 테이프를 종신형으로 수감된 한나에게 보내고 한나는 그에게 편지를 쓸 수 있을 정도로 그 테이프로 글자를 깨우치게 됩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결말
카메라는 백발이 성성한 마이클을 잡아줍니다. 모범수로 조기 출수하게 된 한나를 면회 간 마이클은 한나와 잡았던 손을 살며시 놓으며 “(죽은 자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느냐?”라고 질문합니다. 그때 한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뭘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뭘 느끼는지도 중요하지 않아. 죽은 자들은 여전히 죽어 있을 뿐이야."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한나를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온 마이클. 한나가 출소하는 날 그녀를 데리러 마이클이 갔을 때, 한나는 이미 자살을 한 뒤였습니다.
그녀에게 마지막 인생이 버거웠던 것일까요? 무지에서 벗어나며 보이는 진실들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던 것일까요? 몇몇 장면을 더 보여준 영화는 조용히 엔딩 크레디트를 올립니다.
케이트 윈슬렛 생애 최고의 연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케이트 윈슬렛에게 주어진 대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케이트 윈슬렛은 인간으로부터, 역사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한나가 무엇으로 살 수 있었을까를 우수어린 무지의 눈동자로, 세상과 분절된 된 듯한 몽매한 몸짓으로 한 여인의 몸에 갇혀 있었던 영혼을 스크린에 먹먹하게 재현해 내었습니다.
관객들은 자신의 세계에 소극적으로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메소드 연기였습니다.
케이트 윈슬렛은 한나 역으로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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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한나를 추도하고 싶은 밤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아는 척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극도의 무지와 너무나 뒤늦은 깨우침은 때로 비수보다 더 강하고 날카롭게 존재를 찔러 침몰시킬수도 있다는 것을 영화는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 영화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영화보다 소설이 먼저 책(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김재혁 옮김, 이레, 2004) 으로 소개 되었습니다. 소설 리뷰는 아래 글을 참고 하세요.
☞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소설과 영화 차이, 소년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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