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결혼 18년차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너무 충격적이라 소화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또 전달자가 침을 튀기며 욕설을 하도 많이 하는 바람에 어떻게 정제된 표현으로 옮겨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언제나 빈틈없이 흐르는 법, 벌써 일 년 전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문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기억을 살려 들은 그대로 사실을 전하겠습니다.
결혼 18년차 부부
H는 내심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가 처방한대로 아내가 피트니스센터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웃음소리가 자주 들렸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없던 아내가 사춘기 소녀처럼 눈을 흘기며 치근 거릴 때도 있었다.
사춘기에 막 들어선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풍성한 여자의 몸으로 놀라움을 주듯 그의 아내 W도 굴곡진 몸 어딘가에서 방향을 알 수 없는 색기가 흘렀다. 늦은 밤까지 교태라도 부릴라치면 H는 왜 진작에 피트니스센터에 보낼 생각을 못했을까, 자신을 나무랐다.
H는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이 된 'P'의 창업 멤버였다. 초창기에는 고생했지만 기업이 핫해지면서 스톡옵션을 행사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파트에도 입주했다. 하나뿐인 아들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예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명문 고등학교는 아니었지만 아들이 유학을 갔다는 것만으로도 현모양처를 뒀다는 부러움을 샀다.
W는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바라보며 H는 그만하면 요조숙녀라고 생각했다. H는 신혼 때에도 거의 회사에서 살았다. 회사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어쩌다 집으로 가는 날에도 일거리를 싸들고 방에 틀어 박혔다. 그래도 떡두꺼비 같은 아들은 생겨났다. 그때부터 W는 현모양처로 대우를 받았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H도 덩달아 승진 가도를 달렸다. 페이가 두둑해지는 만큼 비례하여 시간도 남아돌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마법이라고 H는 생각했다. 이제 회사에서 밤을 새울 일도, 일거리를 싸들고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그 무렵, 가볍게 만나는 여자도 여럿 생겼다.
H가 그렇게 승승장구할 무렵 W는 공주가 되어갔다. 열심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W는 공주로 살았다. 얼굴은 창백해졌고 말수는 줄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유학을 가고 둘이만 사는 집안에는 언제부터인가 냉기가 흘렀다. 밖에서는 날아다녔지만 집에만 가면 H는 숨이 막혔다.
튼실해 보였던 와이프가 병든 공주로 변한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H는 시간도, 돈도, 여자도 충분했다. 여자로서 아내는 필요 없었지만 병든 공주와 한 집안에서 이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수소문한 결과, 병든 공주병에는 피트니스센터가 '직방'이라는 처방을 받았던 것이다.
관장의 첩보
병든 공주 W는 남편이 등록해 준 피트니스센터에 못 이기는 척 순순히 나갔다. H는친구가 운영하는 피트니스센터의 상황에 대하여 일일보고를 받았다. W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나와서 땀을 흘린다는 관장의 첩보에 마음을 놓았고, 다시 자유와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W의 얼굴에도 하루가 다르게 생기가 돌았다. 아이를 낳은 이후, 언제 했는지조차 기억에 가물가물한 로맨스도 다시 시동이 걸렸다. H는 비로소 밖에서나 집에서나 행복감이 충만한 인생의 축복을 느꼈다.
그래, 이것이 진정한 자본주의의 마법이지, 생각했다. 만사형통이었다. 와이프의 교태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행복에 겨워할 때쯤 관장의 문자가 왔다. "오늘 이자까야 X에서 술 한 잔 해"
병든 공주를 생기발랄한 왕비로 만들어줬으니 생색을 낼 만하다고 H는 생각하며 이자까야로 향했다. 술을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도 관장은 이상하게 빨리 취했다. 그리고는 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취한 듯 횡설수설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P기업의 창업 멤버였던 관장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피트니스 센터를 열었었다.
"매사에 사리분별 분명하고, 도도하고 까칠하기로 소문난 제수씨, 나도 그런줄로만 알았거든, 니가 하도 그랬으니까. 맨날 와이프가 조금만 더 상냥했으면, 인사성이 밝았으면, 네가 노래 불렀잖아. 절대 먼저 아는 체 안 하고, 사교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뭐, 은근히 자랑삼아 한 말이겠지만. 웃기만 해도 못생긴 얼굴이 얼마간은 커버되고 좀 좋아, 막 그랬잖아. 니가.
관장의 말은 폭포수처럼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H는 제지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횡설수설하는 말에 질서를 부여하고 전후좌우를 정리하여 기승전결을 가늠해 보느라 제지할 겨를이 없었다. 맥락을 겨우 파악할 때쯤 관장은 갑자기 비틀거리며 일어섰고, 그대로 박차고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황망한 일이었다.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H는 이자까야를 나와 귀신에 홀린 듯 멍하니 홀로 걷기 시작했다. 진눈깨비에 옷이 젖기 시작했다. 관장의 말들이 그의 젖은 외투에 화살처럼 꽂혀 상고대로 피었다.
상고대의 뿌리는 비수가 되어 세포 하나하나를 뚫고 들어가 그의 온몸을 점령했다. 그의 몸을 모두 점령한 관장의 말은 마침내 H에게 진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H는 한 가지만 빼고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H가 최종적으로 이해한 관장의 말은 이랬다. W는 피트니스 센터에 오자마자 운동보다는 트레이너에게 관심을 보였고 치근대기 시작하더니 아예 센터에 죽치고 살기 시작했다. 모든 트레이너들과 은밀한 관계를 즐겼고, 남성 고객들에게 접근해 노골적으로 즐겼다.
그 증거로 W가 남자들이 귀찮아하는데도 불구하고 날린 수많은 멘션과 낮 뜨거운 비밀 댓글들이 제시되었다. W는 상대가 반응이 없는데도 끝까지 댓글을 다는 끈기를 보이고 있었다.
관장의 말은 너무나 기묘하고 비현실적이었지만 H는 아내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여자들은 도도하고 까칠해 보이기를 원하니까, 요조숙녀처럼 평가받길 원하는 게 여자라는 동물이니까, 내 마누라도 여자이니까 당연하지, 다른 남자에게 눈이 안 간다면 그게 여자야?
그런데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관장의 마지막 말이 그의 꼭지를 돌게 만들었다.
자정이 되었지만 H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둥지에는 유학을 떠난 아들의 허물이 너즈분하게 널려 있었고 아내의 쓰다만 립스틱이 화장대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빈 둥지로군, 이 말을 되뇌고 피아노를 소화기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 피아노는 그 집에서 음악을 전공한 W를 교양인으로 보이게 하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관장의 마지막 언어
시X년을 연발하며 피아노를 내리치던 그의 눈은 벌써부터 충혈되었다. 자신의 인생이 구역질 나는 짬뽕 같다고 생각했다. 원하지 않는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잡다하게 마구 섞여 들어온 비릿한 짬뽕 냄새 같은 것이라고.
피아노의 마지막 남은 흰 건반까지 모두 박살을 낸 H는 그러나 짬뽕을 부정했다. 자신의 인생은 짬뽕이 아니라 그 누구도 먹기 싫어하는 불어 터진 짜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나쁜 음식은 이 세상에 없다고. 순간, 태어나서 먹은 모든 짜장들이 구역질 나는 짬뽕 국물로 변하면서 좁아든 목구멍을 역겹게 메웠다.
그런데 관장은 왜 마지막에 그런 말을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H는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관장은 그 자신이나 다름없었다. H와 관장은 서로에게 그림자나 같은 존재였다. 그림자가 없으면 서로를 증명할 수 없는 존재처럼 창업 때부터 동고동락한 그들은 마치 전장터의 전우라고 막연히 느꼈다.
타인들은 그들의 관계를 속속들이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겐 그들은 서로를 존재케 하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관장의 마지막 말에 더 분통이 터졌다. 관장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제수씨는 이제 잊어버려. 트레이너는 물론이고 특히 젊은 남성 고객들은 모두 갖고 놀았어. 하도 귀찮게 해서 손님들이 손절하지 않으면 헬스를 끊어버리겠다고 아우성이야. 그러니 제수씨는 내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렸어. 젠장.
아마도 주위에서 이러한 사연은 많이 접해셨을거라 생각합니다.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뼈대만 전하다 보니, 설마 세상에 저런 여자가 어디 있겠어?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SNS에서 광폭행보를 하며 은밀한 대화들을 그녀는 즐기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남편도 알고 주위의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그녀만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여자였는지, 아니면 결혼 생활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생각이 언젠가 영글고 문장이 허락하는 날이 온다면 그 뒷 이야기를 전하는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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